윤기선 씨는 19, 22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윤 씨는 광복 전후 베토벤 협주곡 ‘황제’ 등을 국내 초연하며 화제를 모았던 스타 피아니스트. 1948년 이후 미국에 머물며 하트퍼드대 교수 등을 지낸 윤 씨는 10년 만에 귀국 공연을 가졌다.
두 원로 피아니스트의 인연은 6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개화파 정치가 윤치호(尹致昊)의 아들인 윤 씨는 1938년 일본 도쿄예술대(옛 우에노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한 씨는 이 학교의 대학원생.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것은 최근 한 씨가 수상자 선정 소식을 알리기 위해 미국의 윤 씨에게 전화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한 씨는 “그땐 한국 학생이라곤 우리 둘뿐이었는데도 수줍어서 말 한마디 못했다”며 “기선이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그냥 ‘네, 네’만 하더라고…”라며 웃었다.
한 씨는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을 창업해 한때 ‘조선 제일 갑부’로 불렸던 고 박흥식(朴興植) 화신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광복 후 서울대 음대 교수, 경희대 음대 기악과장 등을 지내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1994년 박 회장이 별세했고, 자신은 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금은 휠체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한 씨는 “외동딸이 미국에 있어 10년 넘게 병원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한 씨의 최근 삶은 나눔의 연속이다. 그는 2000년 동아일보사에 1억 원을 기탁해 그 이자로 동아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 1등 수상자에게 상금을 주도록 했다. 같은 해 경희대에 발전기금 1억 원을 냈으며 올해 1월에는 홍칠나전장(紅漆螺鈿欌) 등 고가구 25점과 1억 원을 숙명여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얼마 전 TV로 나훈아 씨의 노래를 들었는데, ‘100년도 힘든 것을 1000년을 살 것처럼…’이라는 가사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군요. 요즘엔 목걸이며 반지며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전부 남에게 나눠 주는 기쁨에 살아요.”
24일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한 씨는 휠체어를 탔지만 흰 망사 장갑까지 낀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은 한사코 거부하며 “꼭 신문에 내야겠거든 30대 초반에 찍은 예쁜 사진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상을 받은 윤 씨는 “연주회를 끝낸 뒤 정말 행복하면서도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다”며 “도쿄예술대 선배로서 광복 전후에 미인 피아니스트로 인기가 높았던 분이 이런 큰 상을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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