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방은진 감독의 ‘오로라 공주’…27일 개봉

  • 입력 2005년 10월 27일 03시 04분


사진 제공 이노기획
사진 제공 이노기획
외제 자동차를 파는 30대 이혼녀 정순정(엄정화). 그녀는 다섯 건의 잔혹한 살인을 연달아 저지른다. 아이를 학대하는 여자를 백화점 화장실에서 난자하고, ‘싸가지’ 없는 옷가게 여주인의 얼굴을 석고 팩으로 막아 질식시키며, 돈 자랑하는 웨딩홀 사장을 독살한다.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비닐 팩으로 덮고, 고깃집 아들의 성기를 절단해 숨지게 만든다. 각각의 살해 현장에서 어김없이 만화영화 캐릭터인 오로라 공주의 스티커를 발견한 오 형사(문성근)는 정순정이 범인임을 알게 되자 무슨 이유인지 기겁을 하고…. 정순정은 마지막 목표물을 향해 움직인다.

27일 개봉되는 영화 ‘오로라 공주’는 평균점수는 높지만 정작 100점을 맞은 과목은 하나도 없는 수험생을 보는 것 같다. 이야기 연출력 캐릭터 연기…,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수준급이지만 어느 하나도 최고는 없다. 이는 마치 일직선 위를 걸어가듯 ‘사건 배열→사연 제시→주인공의 내면 폭발→클라이맥스→결말’로 착착 이야기가 진행되는, 안전하지만 평평한 전개 방식을 선택한 이 영화의 숙명이다.

‘오로라 공주’가 가진 숨 막히는 효율성과 경제성이란 알고 보면 양날의 칼이다.

우선 이 영화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정순정의 살인 행각이 진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반 박자 빠르게 진행되는 살인은 관객의 호흡을 완전히 훔치면서 충격과 더불어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을 남긴다.


이 영화는 더 근본적으로, 대단한 척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름답다. ‘감독의 자의식 섞인 복수극’이 유행성 독감처럼 충무로에 번지고 있는 요즘, 이 영화는 폼 잡으려 하지 않은 채 딱 떨어지는 장르 영화를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 내면 연기가 일품이던 여성 연기자 방은진이 감독으로 데뷔하면서 과욕을 버리고 자기절제를 보여준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영화 속 정순정이 시체 곁에 붙여 놓은 오로라공주 스티커처럼, 다음 작품에는 분명하게 자신만의 스티커를 붙여야 할 숙제를 안게 됐다.

그러나 이 영화의 효율성은 정순정이라는 인물을 질식할 듯 눌러버리기도 했다. 엽기적인 살해 행각을 벌이는 정순정에게는 절절한 사연과 분열적인 자아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정 떨어질 정도로 착착 진행되는 영화의 속도감과 경제성에 어느새 이런 요소들이 압박 당하고, 정순정의 캐릭터는 결국 스스로 움직일 공간을 내어주고 만다. 살인자든 피해자든 형사든 이 영화가 모두 강렬한 캐릭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창출해내기보다는 정해진 이야기에 못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이 때문이다.

정순정의 살해 동기도 일사천리로 제시되지만, 이 영화는 정순정이 누군가를 죽일 만큼 마음속 상처와 분노를 가졌음을 설명하는 데는 창조적이었던 데 반해, 피해자들이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작업은 관성적이었다.

정순정 역의 엄정화는 이 영화에서 처음 단독 주연을 맡아 시험대 위에 섰다. 그녀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낙천적인 얼굴과 ‘성실한’ 몸매가 주는 이미지와 스스로 맞서 싸워야 할 시점에 왔음을 알아챈 지혜로운 연기자다. 그녀가 덜 산뜻하고 더 분열적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첫 5분과 마지막 5분을 견디려면 마음을 모질게 먹을 것. 18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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