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개봉되는 영화 ‘오로라 공주’는 평균점수는 높지만 정작 100점을 맞은 과목은 하나도 없는 수험생을 보는 것 같다. 이야기 연출력 캐릭터 연기…,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수준급이지만 어느 하나도 최고는 없다. 이는 마치 일직선 위를 걸어가듯 ‘사건 배열→사연 제시→주인공의 내면 폭발→클라이맥스→결말’로 착착 이야기가 진행되는, 안전하지만 평평한 전개 방식을 선택한 이 영화의 숙명이다.
‘오로라 공주’가 가진 숨 막히는 효율성과 경제성이란 알고 보면 양날의 칼이다.
우선 이 영화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정순정의 살인 행각이 진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반 박자 빠르게 진행되는 살인은 관객의 호흡을 완전히 훔치면서 충격과 더불어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을 남긴다.
이 영화는 더 근본적으로, 대단한 척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름답다. ‘감독의 자의식 섞인 복수극’이 유행성 독감처럼 충무로에 번지고 있는 요즘, 이 영화는 폼 잡으려 하지 않은 채 딱 떨어지는 장르 영화를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 내면 연기가 일품이던 여성 연기자 방은진이 감독으로 데뷔하면서 과욕을 버리고 자기절제를 보여준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영화 속 정순정이 시체 곁에 붙여 놓은 오로라공주 스티커처럼, 다음 작품에는 분명하게 자신만의 스티커를 붙여야 할 숙제를 안게 됐다.
그러나 이 영화의 효율성은 정순정이라는 인물을 질식할 듯 눌러버리기도 했다. 엽기적인 살해 행각을 벌이는 정순정에게는 절절한 사연과 분열적인 자아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정 떨어질 정도로 착착 진행되는 영화의 속도감과 경제성에 어느새 이런 요소들이 압박 당하고, 정순정의 캐릭터는 결국 스스로 움직일 공간을 내어주고 만다. 살인자든 피해자든 형사든 이 영화가 모두 강렬한 캐릭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창출해내기보다는 정해진 이야기에 못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이 때문이다.
정순정의 살해 동기도 일사천리로 제시되지만, 이 영화는 정순정이 누군가를 죽일 만큼 마음속 상처와 분노를 가졌음을 설명하는 데는 창조적이었던 데 반해, 피해자들이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작업은 관성적이었다.
정순정 역의 엄정화는 이 영화에서 처음 단독 주연을 맡아 시험대 위에 섰다. 그녀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낙천적인 얼굴과 ‘성실한’ 몸매가 주는 이미지와 스스로 맞서 싸워야 할 시점에 왔음을 알아챈 지혜로운 연기자다. 그녀가 덜 산뜻하고 더 분열적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첫 5분과 마지막 5분을 견디려면 마음을 모질게 먹을 것. 18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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