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나무에 상처를 내 채취하는 옻은 최고(最古)의 도료이며 접착제다. 옻을 일본에 전해 준 이는 우리다. 그러나 이를 문화로 꽃피운 사람은 일본인이다. 우리말로 ‘칠한다’의 ‘칠(漆)’이 곧 ‘옻’인데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런 손상된 자존심을 세워 준 이가 있다. 칠예작가인 전용복(53·일본 이와테 현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대표) 씨. 그는 3000명의 일본 토박이 칠장이를 물리치고 일본 최고의 결혼연회장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의 개축 공사에서 3000억 원 상당의 작품 복원 및 창작품 제작을 맡았다. 5000점의 나전과 칠보 옻칠 그림으로 실내를 도배하다시피 한 이곳은 일본 칠의 보고로 불린다. 그가 한국의 장인들과 함께 복원한 메구로가조엔을 다녀왔다.
전 씨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APEC 2005 KOREA’의 문화축전에서 칠예(漆藝)작품전(부산시청 전시실·11월 13∼20일)을 열 예정이다.
도쿄 중앙부의 메구로 역. 메구로가조엔은 걸어서 5분 거리다. 8층의 현대식 빌딩이 모모야마식 팔작지붕과 조화를 이루는 이 건축물은 울창한 숲을 감싸고 있다. 실내는 예식을 앞둔 드레스 차림의 신부와 신랑, 한껏 차려입은 들러리와 하객들로 분주하다.
일본의 결혼 예식은 이렇다. 참석할 사람만 초청해 혼례와 피로연을 한 장소에서 치르며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논다. 그래서 메구로가조엔과 같은 웨딩콤플렉스(의상실에서 최고급 호텔까지 결혼식 관련 부문을 망라한 복합 공간)가 생겨났다. 1931년 메구로가조엔이 문을 열면서 일본의 예식 문화가 그렇게 정립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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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로비. 현관은 건물 덩치에 비해 좁고 평범하다. 그러나 왼편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검은 옻칠 바탕에 꽃 문양이 자개로 수놓인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나전칠예 작품이다. 옆 벽면에 붙은 황금안내판에는 ‘전영복’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엘리베이터 내부도 나전칠예 장식이다. 바닥만 빼고 사방 벽과 천장이 검은 옻칠을 바탕으로 한 나전으로 보석처럼 빛난다. 이런 엘리베이터가 이곳에 5기(개폐문 37개)나 된다. 나전칠예로 단장한 세계 유일의 엘리베이터다.
이 엘리베이터로 오른 4층. 복도 벽에 메구로가조엔의 역사를 설명하는 사진과 글이 붙어 있다. 한 층 내려가니 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진 복도가 펼쳐진다. 1931년 창업 당시 오리지널 건물의 복도. 1991년 옛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을 때 보존해 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햐쿠단가이단(百段階段)’이라고 불리는 이곳. 메구로가조엔의 옛 연회장을 보존한 박물관 겸 미술관이다. 경사진 복도 계단의 중간에서 연결되는 방은 6개. 모두 당대 화가의 귀한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화재이다.
방 크기는 50∼60 명이 연회를 즐길 정도. 천장과 사방 벽이 옻칠과 칠보로 마무리된 일본화와 나전칠예, 목재부조로 장식됐다. 한 점에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다. 60년간 객실을 지켜 온 작품이 모두 말끔하다. 모두 전 씨의 손길 덕분이다.
200여 개 객실과 300여 m에 달하는 긴 복도의 벽과 천장을 문화재급 옻칠 그림과 나전칠예로 장식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던 옛 메구로가조엔. 그 전통은 1조 원이 투입돼 호화스러운 현대 건축물로 거듭난 지금에도 이어진다. 복원된 미술품만 2000점. 여기에 전 씨의 창작 칠예 작품 3000점이 보태졌다. 그 비용만 건축비(7000억 원)의 절반가량(3000억 원)이다.
1∼4층 연회장의 긴 복도 벽과 천장. 온통 화려한 금박의 미술품으로 치장됐다. 혼례식장과 피로연장 내부도 다르지 않다. 화려하게 옻칠로 단장한 화장실도 일본화로 벽과 천장이 장식됐다. 이 화장실에는 60억 원이 들어갔다.
3000점의 전 씨 창작품도 메구로가조엔 실내외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주로 현대적 감각의 옻칠 그림으로 3층 대연회장 외벽에 걸린 그림은 세로 1.4m, 가로 23.6m의 초대형이다.
전 씨는 “문화의 주인은 만든 이가 아니라 향유하는 이”라고 말한다. 메구로가조엔의 복원작업을 통해 그는 말하는 듯하다. 잊혀진 우리의 옻 문화를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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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 △현지 전화: 03-3491-4111 △지하철: 하네다공항 역(국내선터미널)에서 게이큐센으로 시나가와로 간 뒤 여기서 야마노테센으로 갈아타고 세 번째 정거장인 메구로 역에서 내린다. 서쪽 출입구(西口)에서 전용셔틀버스 탑승.
▽홈페이지 △메구로가조엔: www.megurogajoen.co.jp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www.urushi21.com
○ 패키지 여행상품
메구로가조엔을 답사하는 ‘조선 장인의 숨결을 찾아’(2박 3일)가 있다. 50명 선착순 접수. 특수대학원의 현장답사 및 기업체 인센티브 투어도 운영. 메구로가조엔의 동영상은 씨에프랑스 홈페이지(www.ciefrance.com)에서 볼 수 있다. 1588-0074
도쿄=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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