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故이근삼씨 유작‘멧돼지와 꽃사슴’ 추모 공연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08분


코멘트
작가 특유의 촌철살인의 위트와 따뜻한 정이 배어 있는 이근삼 씨의 유작 희곡 ‘멧돼지와 꽃사슴’을 무대에 올리는 이유정, 김종석 씨(왼쪽) 부부. 오른쪽 사진은 이 연극의 주인공을 맡은 원로 여배우 백성희 씨(오른쪽)와 윤주상 씨. 이훈구 기자
작가 특유의 촌철살인의 위트와 따뜻한 정이 배어 있는 이근삼 씨의 유작 희곡 ‘멧돼지와 꽃사슴’을 무대에 올리는 이유정, 김종석 씨(왼쪽) 부부. 오른쪽 사진은 이 연극의 주인공을 맡은 원로 여배우 백성희 씨(오른쪽)와 윤주상 씨. 이훈구 기자

○ 13년 전의 바람… 딸과 제자, 부부가 돼 연극 만들다

“니네 둘이 함께 연극 한번 해보라우.”

1992년 어느 날, 국내의 대표적인 희극 작가 이근삼 씨가 술에 취해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니네 둘’이란 무대미술을 공부하던 막내딸 유정(38) 씨와 이 씨가 아끼던 서강대 연극반 제자이자 당시 자신의 조교(신문방송학과)였던 김종석(39) 씨다.

무대미술가가 된 딸과 연극 연출가가 된 제자는 그 후 부부가 됐지만, 두 사람이 함께 연극하는 것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버지의 바람은 13년 후에야 이루어지게 됐다.

고인이 된 이 씨의 2주기(28일)를 맞아 마침내 두 사람은 고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유작 희곡 ‘멧돼지와 꽃사슴’을 함께 무대에 올린다. ‘제1회 명작 코미디 페스티벌’ 참가작의 하나로 30일 추모 공연으로 시작해 다음 달 11일까지 문예진흥위원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02-923-2131

○ ‘꽃사슴’ 백성희와 ‘멧돼지’ 윤주상을 위해….

지난달 31일 밤 10시, 서울 강남에 마련된 ‘멧돼지와 꽃사슴’ 연습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난로를 2개나 피워 놓은 채 한창 연습 중이었다.

꽃사슴처럼 고고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왕년의 여배우 ‘소록 여사’ 역은 원로 배우 백성희(81) 씨가, 앞뒤 가리지 않고 멧돼지처럼 저돌적인 성격의 체육 교사는 중견 배우 윤주상(56) 씨가 맡았다. 이 희곡은 처음부터 이 씨가 두 사람을 위해 쓴 작품.

“2000년 봄에 우연히 백성희 선생님과 함께 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백 선생님과 제가 작품을 한번도 같이한 적이 없다는 말에 놀라시면서 ‘내가 (두 사람을 위해) 쓸게’ 하시더군요. 3개월도 안 돼서 이 작품을 들고 오셨어요.”(윤주상)

“대본 곳곳에 제 흔적이 보여 혼자서 웃기도 했어요. 언젠가 이 선생이 저를 두고 ‘(여러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같다’고 했는데 그 말도 그대로 대사에 넣었더군요. 내가 이 선생 작품을 많이 했지만, 이 선생이 나를 위해 희곡을 쓴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이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이 작품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커요.”(백성희)

두 사람을 위해 ‘맞춤’ 생산된 희곡이어서일까? 연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도 대사가 두 배우의 입에 착착 감겼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제대로 된 코미디는 인생의 페이소스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잘못된 코미디가 너무 많다”며 “가벼운 웃음들이 판치는 이런 시대일수록 이 선생이 더 그립다”고 말했다.

○ ‘꽃사슴’ 같은 환상 ‘멧돼지’ 같은 현실

‘멧돼지’와 ‘꽃사슴’은 각각 두 주인공의 성격과 함께 현실과 환상(꿈)을 상징한다. 상반된 두 사람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작품. 이근삼 특유의 촌철살인의 위트와 함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이 희곡에는 지문이 아예 없다. 생전에 이 씨가 지문 없는 이 작품을 주며 “알아서 하라우”라는 말만 남겼기 때문.

연출을 맡은 사위 김 씨는 “멧돼지 같은 사람에게도 꽃사슴 같은 면이 있고, 꽃사슴 같은 사람에게도 멧돼지 같은 면이 있다는 점에서 멧돼지와 꽃사슴은 한 사람의 양면성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며 “이 작품의 화두이자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인 ‘꿈과 환상’은 아버님의 후기 작품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주제”라고 설명했다.

딸 유정 씨는 “작품에 아버지가 평소 집에서 하던 일상 대화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며 “아버지가 이 작품을 보실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작품을 통해 매일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어 행복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