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포가 팽성으로 돌아가 돌봐주는 덕분에 군량 걱정은 덜었으나 아주 마음을 놓을 처지는 못된다. 팽월이 언제 다시 양도(糧道)를 끊어 우리를 굶주리게 할지 모르니 이곳 광무에서의 싸움을 하루바삐 끝내야 한다. 무슨 좋은 방책이 없겠는가?”
항우가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렇게 물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다가 한신이나 진평 같은 인재를 잃고 범증같이 뛰어난 책사(策士)를 상심해 죽게 만들기는 했지만, 패왕도 아직은 생각이 막히면 다른 사람을 불러 그 말을 들을 줄 알았다. 진평의 계략에 걸려 하마터면 모두 내쫓길 뻔하기는 했지만 장수들도 아직은 패왕을 군왕으로 믿고 우러렀다. 이미 스스로 나서 패왕에게 계책을 내는 일은 드물어졌으나 물으면 아는 대로 대답은 했다.
그날도 그랬다. 오래 대답 없이 머뭇거린 뒤이기는 하였으나 말수 적은 종리매가 제법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를 했다.
“이곳의 싸움은 한군이 산을 내려와 싸워 주지 않는 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군은 이미 달포가 되도록 굳게 산성에 들어앉아 지키기만 할 뿐 나와서 싸울 뜻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싸움을 끝내는 길은 뱀의 머리를 자르듯 한군의 머리가 되는 유방을 죽여 서광무의 진채를 쓸모없이 만들어 버리는 것뿐입니다.”
“유방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나머지 군사들은 개미나 쉬파리 떼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저 높고 험한 진채 깊숙이 자라처럼 모가지를 움츠리고 처박혀 있는 유방을 어떻게 잡아 죽일 수 있겠는가?”
패왕이 반갑지만 미덥지 않다는 눈길로 종리매를 바라보며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종리매도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닌 듯했다. 이번에는 별 머뭇거림 없이 패왕의 말을 받았다.
“신이 살피니 그동안 유방은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려 하지는 않았으나, 말로 하는 싸움에는 반드시 나타나 대왕께 대꾸해 주었습니다. 특히 광무간을 사이에 두고 하는 말싸움은 한 번도 피하지 않았으니 그 방심을 틈타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유방이 방심하고 있다 한들 100길도 넘는 낭떠러지 저편 진채에 있는 그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서광무와 동광무 사이는 넓어야 100걸음을 크게 넘지 못합니다. 강한 쇠뇌로 쏘아붙이면 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갑옷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종리매가 거기까지 말하자 패왕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평소 패왕의 기질대로라면 그런 종리매의 계책은 좀스러운 잔꾀로 여겨 쓰기를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패왕은 조금씩 다급함에 몰리고 있었다.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더 따지지 않고 말했다.
“알았소. 덫을 놓든 올무를 놓든 잡아야 할 여우는 반드시 잡을 수 있는 사냥꾼이 좋은 사냥꾼이오. 한번 그리해 봅시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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