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03>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1월 3일 03시 0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 항우는 그날로 군중(軍中)에 명을 내려 그 살이 5백 걸음이나 날아간다는 강한 쇠뇌 석 장(張)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광무와 가까운 벼랑가 한 곳을 골라 그 쇠뇌들을 눈에 띄지 않게 걸어두게 한 뒤, 장졸 중에 가장 뛰어난 궁수 셋을 골라 말했다.

“너희들은 내일 새벽 날이 새기 전에 각기 이 쇠뇌들 곁에 몸을 숨겨라. 그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한왕 유방을 저편 벼랑 위로 불러내거든 틈을 보아 쇠뇌를 쏘아라. 유방이 백 걸음 안으로 다가들면 쇠뇌를 쏘되, 모두가 다 쏠 것은 없고 가장 가깝고 겨냥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게 된 자가 천천히 겨눠 쏘면 된다. 만약 하늘이 도와 유방을 잡게 되면 너희들은 모두 만금(萬金)의 상을 받고 장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기 전에 인기척을 내어 적병에게 들키거나 유방이 알아차리게 하여 일을 그르치면 아무도 그 목이 어깨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이 되었다. 모든 것이 잘 안배(按配)되었음을 확인한 패왕은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려 쇠뇌가 감춰진 벼랑가로 갔다.

“한왕은 어디 있는가? 자라새끼처럼 목을 움츠리고 숨어있지만 말고 과인의 말을 들어라!”

패왕이 그렇게 소리쳐 한왕을 불러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한군 진채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러다가 제 성을 못 이겨 달아오른 패왕이 이졸들을 시켜 갖은 욕설을 퍼부은 뒤에야 한왕 유방이 맞은편 벼랑 멀찍한 곳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대는 또 무슨 일로 과인을 찾는가? 공연한 혈기로 애꿎은 장수만 죽이고도 아직 모자라는가? 그래도 기개가 가상하여 시체는 거두어가게 하였거늘….”

한왕이 그렇게 패왕을 나무랐다. 그동안 패왕의 외침 소리나 초나라 군사들의 욕설은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느긋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실은 패왕의 천둥 같은 고함소리 때문에 광무간이 시끄러워지자 양쪽 진채 군사들이 모두 내다보고 있어 더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내밀고 말로라도 패왕을 이겨 초나라 군사들의 기를 꺾는 한편 마냥 움츠러들기만 하는 한나라 군사들을 다독여야 했다.

패왕은 한왕 유방이 멀쩡한 얼굴로 이죽거리자 가슴속에 천 길이나 되는 불길이 이는 듯했다. 무섭게 꾸짖어 얼부터 빼놓고 싶었으나 벼랑 구석에 감춰둔 쇠뇌를 떠올리고 참았다.

(네놈이 아무리 엉큼하고 능청스러워도 이제는 끝이다. 이제 다시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나를 성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잖게 유방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이렇게 그대를 불러낸 것이다. 그날 그 누번(樓煩)놈이 그대를 닮아 쥐새끼처럼 머리를 싸매고 달아나지 않았던들 애꿎은 장수가 이쪽 그쪽 둘이나 죽을 뻔했다. 그래서 과인이 다시 말하거니와, 어떠냐? 한왕은 나와 단둘이 겨뤄 자웅을 가려보지 않겠느냐?”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내 그대와 지혜를 다툴지언정 힘을 겨룰 수는 없다고. 그대의 귀는 해골이 비고 가죽이 모자라 뚫린 것이냐? 어찌 그리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늘 그랬듯이 한왕이 다시 그렇게 이죽거려 패왕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궁수들이 쇠뇌를 쏘기 좋은 자리까지 한왕을 끌어내야 하는 패왕은 이번에도 잘 참았다. 여전히 점잖은 목소리로 한왕의 말을 받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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