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깨닫다’는 ‘생각(生覺)’은 상당히 파격적인 책이다. 글쓴이의 삶이 그렇고 생각의 방법이 그렇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사고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는 이 사회의 주류에서 비켜서 있는 듯하다. 그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때 더욱더 논리의 날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 문화의 특징을 ‘주눅 듦’이라고 규정한 그의 글쓰기는 자유로운 사고를 지향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념과 당위를 되짚어 봄으로써 다양한 생각과 삶을 인정하자는 뜻이다. 그의 주장이 바로 나의 생활이나 삶이 될 수는 없지만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나 명쾌한 논리는 즐겁기까지 하다.
‘베이비복스’와 ‘이하늘’의 대립 속에서 그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구도를 제기한다. 더욱이 ‘댄스’와 ‘랩’ 간에 존재하는 장르 우월 의식이나 한국 사회에 내재한 ‘장유유서’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다양한 삶의 논리를 보여 줄 좋은 사례다. 이제는 수많은 일상의 하나가 되어 버린 ‘100만 인 서명운동’도 마찬가지다. 머릿수로 말하기 시작할수록 소수의 의견은 설득력을 잃는다. 100만 인이라는 머릿수는 결국 물량과 물리적 힘의 세기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의 방증일 뿐이다.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통과의례처럼 읽어보는 ‘삼국지’의 독법에서 그의 논리는 더욱 돋보인다. ‘삼국지’가 ‘한족을 위한 한족의 선전물’이라는 생각을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고정 불변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황건군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는 역사 기술은 자칫 오늘의 우리 역사를 굴절시킬 수 있고 ‘존왕충군’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주군의 실정을 목숨 걸고 만류하기보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잘못된 논리의 근거가 된다.
반대로 ‘삼국지’를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볼 때 그것은 역사적 교훈의 샘이 된다. 예를 들어 ‘칠종칠금’은 강자인 제갈공명의 지략과 황제의 감화를 기리는 고사 성어다. 하지만 맹획의 입장에서 본다면, 약소민족의 존엄성과 독립성은 주체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저항할 때 지켜질 수 있다는 깨달음과 교훈이 가능해진다.
닫힌 사회의 논리는 빈약하기 마련이다. 볼테르가 말했듯이 “나는 당신을 반대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당신이 말할 권리를 방어하겠다”는 열린 사고 속에서만 우리는 하나가 되고 논리는 꽃을 피운다. ‘생각’을 읽고 난 뒤의 생각이다.
문재용 서울 오산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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