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삼각형으로 자른 스티로폼 조각들을 한지로 싼 뒤 평면의 나무 캔버스에 퍼즐처럼 붙여 먹으로 염색하는 ‘집합(Aggregation)’ 연작으로 스위스 바젤과 미국 시카고 등 굵직한 아트페어에서 매진 행진을 했다. 이름만 대면 아는 다국적기업과 미술관이 단골 컬렉터인 전 화백은 12월 세계 10대 화랑 중 하나인 영국 런던의 ‘애널리 주다 갤러리’에서 대규모 초대전을 열 예정.
15일∼12월 18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02-735-8449)에서 3년 만에 여는 그의 개인전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품을 신작들로만 만나볼 수 있는 전시. 전 화백은 50대가 되어서야 ‘뜬’ 전형적 대기만성 작가다. 늦익는 사람들이 겪기 마련인 오랜 인고의 세월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이 “거부(拒否)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회고한다.
가업(벽돌공장)을 잇지 않는 아들과 인연을 끊은 아버지의 거부, 청운의 꿈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미국 화단의 거부, 귀국 후 작가의 오랜 공백과 실험정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한국화단의 냉대는 홍익대 미대, 미국 필라델피아 미대 졸업이라는 나름대로 주류의 학맥을 좇아온 그였기에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여기에 쓰레기통까지 뒤질 정도의 가난까지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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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막노동을 하던 시절, 그는 어느 날 이런 글을 남겼다.
‘…작업실 바닥은 온통 물바다였다. 밤새워 그린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눈빛은 증오로 이글거리고, 불끈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흙탕물을 손으로 치며 울부짖었다. 하나님 절 좀 내버려 두세요. 도와주진 못할지언정 못살게 하지 마시고 모르는 척 좀 해달란 말이에요!’
귀국해서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자고 시작했던 미술학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겨우 여유를 찾기 시작한 그에게 다시 닥친 고민은 작품에 대한 회의. ‘빛’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추상을 그려온 그는 상상력의 고갈과 씨름했다. 아내와 함께 무작정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점점 나의 것, 우리의 것이라는 정체성과 맞닥뜨렸다.
“안 맞는 옷을 억지로 껴입듯 너무 남의 것에 몰두했다는 자각이 들면서 문득 우리 옛 어른들이 쓰던 물건들이 새로워 보였다.”
한지를 이용한 그의 독특한 작품은 이렇게 탄생됐다.
“고향에 갔다가 강원도 집안 큰할아버지 한약방 천장에 주렁주렁 걸려 있던 약봉지에서 영감을 받았다. 잘게 썬 스티로폼들을 한지로 싸는 행위 속에는 우리만의 독특한 보자기 문화가 있다. 서양의 박스(Box) 문화는 계량, 정형으로 틀 지워진 문화이지만 넉넉하게 감싸는 우리의 보자기는 정(情)을 상징한다.”
신작들은 단순한 집적에서 벗어나 입체효과가 두드러진다. 먹의 농담과 스티로폼 조각들의 대소가 빚어내는 입체 효과는 논바닥에 파인 발자국 같기도 하고 운석이 떨어진 자리 같기도 하다. 대부분 1000호가 넘는 대작들인데 한 작품에 3만여 개의 스티로폼 조각들을 싸고 묶고 붙이니, 많으면 10만 번가량 손길이 닿는 셈. 인간의 노동이 주는 따뜻함과 힘을 느끼게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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