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21>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1월 24일 03시 0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갑자기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한군 진채 쪽에서 한 갈래 기마대를 앞세운 군사들이 몰려나왔다. 앞서 휘날리는 기호(旗號)를 보니 한나라 기장(騎將) 관영이었다. 용저는 전에 한번 관영의 불같은 기백을 뜨겁게 맛본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기마대를 뒤따르는 한군 보졸도 놀란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엄청난 머릿수였다.

‘내가 속았구나. 간교한 한신이 얽은 덫에 걸려들었다….’

그런 짐작이 들자 어지간한 용저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옛일로 자신을 북돋우며 자꾸만 자라가는 무력감을 추슬렀다.

‘내가 누구냐? 3만 군사로 진나라의 명장 왕리(王離)의 20만 대군을 대쪽처럼 쪼개 놓은 천하의 용저다. 또 그때는 당양군(當陽君)이던 경포와 함께 그 험한 함곡관을 한나절에 깨뜨린 나다. 오너라. 얼마든지 오너라.’

그러면서 용저는 한신과 관영의 군사들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싸웠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다시 멀리서 함성이 일며 이번에는 유수(유水) 상류 쪽에서 다시 한 갈래 군사들이 밀고 내려왔다. 몰리는 가운데서도 눈길을 모아 살피니 앞선 기호에는 ‘한(漢) 우승상 조참’이란 여섯 자가 뚜렷했다.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로 쌓았던 둑을 터뜨리고 돌아오는 조참의 군사들이었다.

조참까지 대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두려워할 줄 모르던 용저도 비로소 으스스해지며 맥이 쭉 빠졌다. 몸을 뺄 길이 없나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어디나 한군의 창검과 기치가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러다 한 군데 창칼의 숲이 엷은 데가 있어 자세히 보니 유수 쪽이었다. 그러나 유수 바닥은 아직도 벌건 황토물이 거센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죽을 곳이 여기었던가. 여기서 이렇게 죽기 위해 그렇게도 맹렬하게 달려온 것일까.’ 이윽고 용저는 그런 자조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칼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 초나라 군사들을 함부로 죽이고 있는 한군 사이로 뛰어들었다.

초나라에서 으뜸가는 맹장 용저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참과 관영의 군사들이 합쳐진 난군 속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싸우다가 죽은 탓에 누구도 그게 용저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싸움이 끝난 뒤 사로잡힌 용저의 부장(副將) 주란(周蘭)이 알려주어서야 용저가 그렇게 죽었음을 알고 그 목을 거두었다.

‘사기’의 ‘조승상 세가(世家)’에는 용저를 목 베고 주란을 사로잡은 것이 조참이라고 되어 있고, ‘관영 열전(列傳)’에는 관영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史實)을 기술하는 데 엄밀한 태사공(太史公)이 그렇게 엇갈린 기술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런 용저의 최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 군사들에게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바람에 양쪽 모두의 공이 된 듯하다.

한신이 용저를 따라 유수를 건넌 초나라 군사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았을 무렵 해서야 유수의 물도 빠졌다. 이에 한신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유수를 건너 동쪽 벌판에 남아 있는 초나라 군사와 제나라 군사들을 들이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원군(援軍)의 태반을 황토물에 떠내려 보내고 얼이 빠져 있던 제왕 전광은 그런 한신의 대군과 맞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군사를 이끌고 고밀성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가 그날 밤 어둠을 틈타 다시 멀리 성양(城陽)으로 달아났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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