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광폭한 세상 앞에서 예술가들도 절망했다. 일부 예술가들은 붓과 팔레트, 캔버스를 구태의연한 낭만주의라 냉소하면서 기존의 질서나 권위를 부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미술이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1960년대 서구 미술사에 나타난 이 전위의 정점에 프랑스 출신 조각가 페르난데즈 아르망(올해 10월 77세를 일기로 작고)이 있다. ‘절대’를 강조하는 시대에 ‘상대’에 주목한 그는 주변에 버려지는 물건들을 조각가적 상상력으로 재조합하면서 ‘영원한 정답’은 없다는 것을 이미지로 보여 준 사람이다.
그는 쓰레기 트럭이 쏟아낸 부스러기들로 전시장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채운다든지, 폐타이어를 높이 쌓아 올린다든지, 폐차량과 시멘트를 버무려 탑을 만든다든지 하는 충격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유례없는 번영으로 삶은 매일 더 편리해진 듯 보였지만, 쾌락주의와 획일화를 강조하는 조류에 질식할 듯했던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질주와 물신숭배를 돌아보는 ‘멈춤’의 철학을 읽었다.
16일∼내년 1월 1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예화랑(02-542-5543, 3624·입장료 성인 5000원, 학생 어린이 3000원)에서 열리는 아르망 작품전은 그의 전위적 메시지가 등장한 지 십여 년이 흘렀지만, 작가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버려진 일상생활용품을 소재로 했던 초기 작품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사물의 용도와 경제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부정하는 표현을 했던 전성기 때 작품들이 나온다.
세로로 절단한 인체의 단면들을 경첩으로 연결한 작품을 비롯해 첼로 의자 바이올린 커피포트 등이 마치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형태로 변신했다. 조각 작품을 중심으로 회화, 판화 등 총 30여 점이 나온다. 관람객들이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전시장을 꾸며 연말에 아이들과 함께 가보는 것도 좋겠다.
올해로 개관 27년째를 맞는 중견화랑인 예화랑이 이전 기념 재개관전으로 준비하던 도중인 10월 22일 작가가 미국 뉴욕 자택에서 별세하는 바람에 국내전이 그의 유작전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명예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문화영웅인 그에게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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