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 사망

  • 입력 2005년 12월 8일 02시 57분


1973년 초 피비린내 나는 보복극이 시작됐다.

세계 각지에서 수십 명의 아랍인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 테러 공격이 단행됐다. 처참한 최후를 맞은 그들은 바로 전해 서독 뮌헨 올림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검은 9월단’ 지도부. 보복은 이스라엘 첩보조직 모사드의 ‘작품’이었다.

총지휘자는 골다 메이어(1898∼1978) 이스라엘 총리였다. 그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암살 작전을 지시한 것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도덕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겠죠.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원조 ‘철의 여인’이었다. 아랍 국가로부터 점령한 영토의 반환을 끝내 거부했고,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던 나치 전범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 정부의 허락도 없이 빼내 오는 외교 무례를 서슴지 않았다.

“동정을 받으며 죽거나, 미움을 받으며 살거나. 이 둘 중에서 택해야 한다면 나는 미움을 받고라도 살겠습니다. 생존의 문제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어릴 적 그가 터득한 생존 원칙이었다. 러시아에서 그의 가족은 숨죽이고 살았다. 유대인의 운명이었다.

20대 초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그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소련주재 대사, 노동장관, 외무장관을 거쳐 1969년 71세의 나이에 총리에 올랐다.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는 이 할머니를 가리켜 “우리 정부에 있는 단 한 명의 남자”라고 말했다.

전쟁 영웅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강철 같은 의지만으로는 성공한 리더가 될 수 없는 법. 그에게는 아랍 포로 병사의 손을 잡아 주는 따뜻함과 외국 순방길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소탈함이 있었다. 이런 인간미가 있었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그가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더는 이스라엘에 ‘침략자’라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8년 12월 8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런 조사(弔辭)를 보냈다.

“왜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가. 대부분은 권력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어가 지도자가 된 이유는 달랐다. 그리고 단순했다. 국민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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