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나던 1960년도 민주당 정권의 추가 경정예산 6088억 환 중 외국 원조금액이 3169억 환으로 52%다. 나라예산마저 절반을 넘도록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된 국가이면서도 통계상으로 보는 한국의 실가치는 48%에 불과한 것이었다.’(박정희 전 대통령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중)
박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이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상품을 국제시장으로 무한히 진출케 하고 자본과 기술을 국제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파병과 한일 국교정상화는 불가피한 결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한국 경제에 베트남 특수는 단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선 현금 수입이 쏠쏠했다. 참전한 국군 장병들이 9년 동안(1965∼73년) 미국으로부터 받은 해외 근무 수당은 모두 2억3556만8400달러로,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800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한국기업들은 군수물자 납품 및 용역 사업이라는 전쟁특수를 누렸다.
참전 기간 중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지원은 괄목할 만했다. 6개항의 경협과 미국을 비롯한 영국,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등 우방 각국으로부터 상업차관이 들어왔고 대미 수출도 급증해 1968년엔 한국의 대외 교역량의 52%에 이르렀다.
1964년 군의관과 태권도 교관단 파견으로 시작된 파병은 1965년 청룡부대, 맹호부대, 1966년 백마부대가 감으로써 총 4만5000여 명에 달했다. 남한 인구의 622분의 1이었다. 당시 미군은 31만 명이었는데, 이 역시 우연의 일치인지 미 전체 인구의 622분의 1이었다.
파병 7년 만인 1971년 12월 9일 국군 첫 철수 부대가 부산항에 도착한다. ‘베트남으로 갔던 수많은 김 상사’들이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첫날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는 그 시절 ‘따이한’들이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흘린 피와 바꾼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숙연해진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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