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 100번째영화 좌초위기

  • 입력 2005년 12월 9일 02시 59분


“그런 게…, 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요. 모든 게 내 책임이오.”

8일 임권택(林權澤·69·사진) 감독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그에게 줄곧 따라붙은 ‘세계적 거장’이란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어두웠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10일로 예정된 첫 촬영을 코앞에 두고 좌초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임 감독과는 오랜 지기이자 파트너로 ‘천년학’의 제작을 맡기로 했던 태흥영화사 이태원(李泰元·67) 사장이 최근 “이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을 임 감독에게 전해 온 것이다. 이 사장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임 감독과 내가 어떤 사이야? 예전 같으면 당연히 내 돈으로 했지. 손해를 보더라도 말이야. 임 감독 영화를 좋아하니까. 근데 지금은 나도 힘이 많이 빠지고 돈도 없어. 영화에 스타가 없고 그래서 돈이 안 될 것 같으니까 투자자들이 싹 빠져나가….”(이태원 사장)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로 일찌감치 관심을 모은 ‘천년학’은 ‘서편제’의 뒷이야기에 해당된다. 소리꾼 아버지와 눈먼 딸의 한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당초 스타급 배우들에게 출연을 타진했지만 하나같이 “흥행 가능성이 낮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기엔 지난해 약 60억원의 총제작비를 들인 ‘하류인생’의 흥행 실패(58만 명)도 한몫을 했다.

이 사장은 “영화가 엎어지게 할 순 없잖아. 다른 제작자를 알아보고 있어”라면서도 “어디 요즘 관객들이 영화를 영화로만 보나…”하고 말끝을 흐렸다. 작품성에 상관없이 스타가 출연하지 않으면 외면하는 현실이 야속한 듯했다.

이 사장은 원래 롯데시네마의 투자를 받기로 하고 스타급 배우 캐스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결국 연극배우 출신 신인 김영민과 오정해를 주연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롯데시네마 관계자는 “원래 계약자가 발을 빼면 우리도 모든 걸 새롭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2년 ‘취화선’으로 한국 감독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명예황금곰상 수상을 통해 한국영화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은 임 감독. 박상민 오정해 조승우 등 ‘초짜’ 배우들을 발탁해 스타로 키워냈지만, 스타 시스템이란 냉혹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위기에 처했다.

임 감독은 “이름 있는 연기자가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 건 당연한 거예요. 투자자들을 나무라면 안돼요”라며 “관심을 보이는 데도 있으니까 내년 봄에는 꼭 촬영에 들어가야지요”라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을 빛낸 감독이라며 열광하더니 막상 영화는 외면하는 관객들이 야속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 전혀 섭섭하덜 안 해요. 내가 그만한 위인이 못 되니 다 그러오.”

‘천년학’이 날기까지, 그 날갯짓은 참 힘들 것 같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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