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출장이 많은 편인 데다 퇴근해 집에 오면 아이들은 TV에 푹 빠져 있었지요.”
가족 간 대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 씨는 바로 TV를 없앴고 거실에 만화 역사책 등 여러 종류의 책을 마련해 언제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엔 드라마나 뉴스 시간이 다가오면 답답하고 땀이 나는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김 씨는 “아이들이 처음엔 ‘TV를 안 보니 친구들과 만나도 대화를 따라갈 수 없다’며 투덜거렸다”며 “하지만 지금은 함께 책을 읽거나 산책도 하고, 줄넘기 배드민턴을 하는 등 온 가족이 함께 즐기니까 아이들도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는 즐거움이란 게 멀리 있지 않더군요. 다들 TV만 볼 땐 퇴근해도 별 낙이 없었는데 이제는 온 가족이 함께 책을 읽고 얘기하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안락합니다. 특히 큰애가 사춘기인데도 책 얘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 관계나 고민을 꺼내 놓는 등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 가는 느낌입니다.”
가족을 삶의 중심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다.
지난 일요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일대 쪽방촌에서 가족과 함께 도배 자원봉사를 하던 김선우(48·서울 서초구 잠원동) 씨는 “아이들과 함께 봉사하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며 웃었다. 서울지하철공사 직원인 김 씨는 야근이 잦아 딸 혜리(16) 양, 아들 광순(15) 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가끔 일찍 귀가해도 TV나 볼 뿐 대화는 갈수록 막혀 갔다. 그러나 봉사 나온 첫날 김 씨의 날렵한 도배 솜씨에 아들이 “아버지도 이런 걸 할 줄 아세요”라며 놀라워했고, 부인과의 연애담과 신혼 초 직접 도배를 했던 이야기를 해 주면서 부자간 대화의 물꼬는 자연스레 터졌다.
박현주(朴泫珠·29·여·서울 서초구 서초동) 씨 가족은 인터넷 가족신문을 만든다. 가족의 대소사, 누가 상을 탔다는 얘기, 취직 인사이동 등의 소식을 정해진 시간까지 막내 삼촌에게 보내면 여기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남긴 편지 등을 합쳐서 편집해 e메일로 30여 명의 가족, 친척에게 보낸다. 지금까지 14차례 만들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김영우(金永雨·28) 씨 가족은 인터넷에 가족카페를 만들었다. 김 씨가 군복무 중이던 2004년 4월 아버지의 제의로 만들었는데 가장 부지런히 글을 올리는 사람은 지방에 있는 아버지다. 그러면 출가해 서울에 살고 있는 누나들과 김 씨가 댓글을 올린다. 김 씨는 “아버지는 독수리 타법이어서 한 줄 치는 데 10분 이상 걸리지만 가장 열성적으로 글을 올린다”고 말했다.
핵가족화에 따라 여가활동을 친척 이웃 등 여러 가족이 함께 어울려 하는 것도 뚜렷한 추세다. 과거의 대가족 대신 ‘가족 연합’이 등장한 것.
3년 전부터 매주 주말농장을 찾는 손장익(41·서울 노원구 월계동) 씨는 올해 들어선 사촌과 처가 가족들도 함께 간다. 손 씨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무와 배추 심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즐거워하신다”며 “온 가족이 하나 돼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성과”라고 말했다.
가족 중심 문화의 확산에 따라 1992년 600가족에 불과하던 주말농장 참여 가족은 현재 수도권에서만도 1만9000여 가족으로 크게 늘었다.
이 같은 ‘가족 품으로’ 추세의 중심에는 30, 40대가 있다.
“예전 세대는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성장을 가정의 앞에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가정이 편치 않으면 성장이 흔들린다는 걸 젊은 세대는 깨닫게 됐다. 특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가족애가 강한 가족은 위기 때 오히려 더 강하게 결속해 위기를 극복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가족은 사상누각처럼 해체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 영향으로 사회 분위기가 일, 술, 친구 중심에서 가족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태다.”(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
연세대 김재엽(金在燁·가족복지 정신건강) 교수는 “미국에서도 나이든 부모를 중심으로 자식들이 다시 모이는 추세”라고 전했다. 최근 미국 통계국 보고서에 따르면 조부모 부모 자녀 등 3대 이상이 함께 사는 가구가 1990년 300만 가구에서 2000년 420만 가구로 38% 증가했으며 두 세대가 함께 사는 가구도 8.4% 늘어났다. 김 교수는 “1960, 70년대 자유분방한 삶을 주창했던 사람들이 노년이 되면서 가족의 결핍이 주는 아픔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가족이란 일시적이고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인간 삶의 행복을 담보하는 핵심 가치라는 깨달음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진한 기자 likeday@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언니 떠난뒤 알았어, 빈자리가 큰 것을…”▼
언니.
언니가 떠난 지도 벌써 반년이 더 넘었네. 꽤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이렇게 언니를 마음속으로만 불러도 아직 가슴 아프고 목이 메어 와. 언니가 좋은 곳에 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언니가 아프고 힘들어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정말이지 언니가 우리 곁을 떠난 후 엄마 아빠가 너무 힘들어 하셨어. 옛말은 정말 틀린 게 하나도 없더라.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 조금은 알 것 같아.
언니가 결혼하기 전 쓰던 방에는 언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그대로 있어. 이모와 고모들이 이제는 그 방 좀 바꾸라고 해도 엄마 아빠는 꿈쩍도 안 하셔. ‘은경이 아빠’에서 ‘현경이 아빠’로의 전환도 쉽지 않은가 봐. 아직도 엄마는 항상 ‘은경이 아빠’라고 아빠를 부르시지…. 또 얼마 전 아빠가 삼촌한테 전화하시는 걸 봤는데, 거기서도 아빠는 ‘나 은경이 아빤데…’라고 너무도 자연스레 말씀하시더라.
언니!
언니의 아픔과 죽음으로 인해 나, 아니 우리 가족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아. 다행스럽게도 좋은 쪽으로! 언니의 죽음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가족 간의 사랑은 더욱 끈끈해진 것 같아. 또 우리 가족 모두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
무뚝뚝한 아빠가 요즘 얼마나 자상해지셨는지…. 요즘 엄마한테 하시는 거 보면 우리 아빠도 이제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로맨티스트란 생각이 들어(진작에 좀 그러시지). 아빠가 요즘처럼 매력 있게 보인 적도 없었던 것 같아.
일 때문에 항상 바쁘고 급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관형이도 많이 달라졌어. 일찍 일찍 집에 들어오는 건 당연하고 주말마다 엄마 아빠 모시고 가까운 데라도 나가려 하는 모습이 꽤 가정적인 미래의 아버지, 남편감으로 보여(비록 지금 여자친구는 없지만).
나는 어떠냐고? 나도 변한 것 같아. 언니가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나 요즘은 유치원 잘 안 돼도 크게 걱정 안 해. 많이 가르치는 거보다 적은 아이들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래도 유치원 문 닫을 수준은 아니니 걱정은 마!
언니! 오늘 밤은 어렸을 때 언니와 한방에서 자던 생각이 유난히 나네…. 언니를 기억하며 항상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낼게. 언니도 하나님 품 안에서 항상 행복하길! I love you!
2005년 10월 9일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 현경이가
※편지를 쓴 이현경(33) 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유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1999년 결혼해 일본으로 간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올해 5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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