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부터 이 여름까지 이 부근에서 싸우다 죽은 장졸들을 알아보고 먼저 그 시신부터 거두어들이도록 하라. 그들을 정성 들여 염습(殮襲)하고 좋은 수의를 입힌 뒤 관(棺)에 담아 고향집으로 보내 주어라. 뒷날 이 고약한 싸움이 끝나면 여기뿐만 아니라 모든 싸움터에서 과인을 위해 죽은 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그 부모처자에게 돌려보내리라.”
한왕이 그렇게 영을 내리자 이졸들이 광무산 아래위와 형양 성고 부근까지 뒤져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한군의 시체를 거두었다. 그리고 한왕이 시킨 대로 염하여 관에 넣은 뒤 고향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걸 본 한나라 장졸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죽어 쓸모없는 주검까지 저리 인정을 베푸시니 살아 대왕을 위해 싸우는 우리들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이 한 몸 돌보지 않고 싸워 반드시 우리 대왕의 날을 보리라!”
한왕은 또 자신을 위해 공을 세우고 죽은 이들에 대한 보훈(報勳)에도 힘을 쏟고 정성을 다했다.
한왕은 먼저 지난해 형양성에서 자신으로 가장하고 거짓 항복으로 패왕을 속인 뒤에 붙잡혀 불타 죽은 기신(紀信)의 혈육을 찾아보게 했다. 안타깝게도 군중(軍中)에는 기신에게 가까운 피붙이가 전혀 없었다. 이에 한왕은 그 고향집에 사람을 보내 그 가솔들에게 많은 금은을 내렸다.
한왕은 그 다음으로 역시 형양에서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패왕에게 사로잡혔으나 끝내 항복하기를 마다하고 솥에 삶겨 죽은 주가(周苛)의 혈육을 찾아보게 하였다. 마침 진중에는 주가의 종제(從弟)인 주창(周昌)이 중위(中尉)로 일하고 있었다. 한왕은 주창을 어사대부(御使大夫)로 올려 세움으로써 그 종형 주가의 공을 기렸다.
역상((력,역)商)을 양나라 승상으로 올려 세우고 4000호(戶)의 식읍(食邑)을 약속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왕을 위해 제나라를 달래러 임치로 갔다가 뜻하지 아니한 한신의 공격으로 화가 난 제왕에게 삶겨 죽은 그 형 역이기((력,역)食其)에 갈음한 포상이었다. 뒷날의 일이지만, 역이기의 아들 개(疥)도 장수로 싸웠는데, 크게 세운 공이 없이도 자주 후한 상을 받고 제후로 봉해졌다.
한왕은 주가와 함께 형양성을 지키다가 역시 함께 패왕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당한 종공(종公)도 잊지 않았다. 진중을 뒤져 종공의 혈육을 찾다가 끝내 가까운 혈육이 없자 기신에게 했듯 그 고향집에 후한 포상을 내려 보냈다. 그리고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많은 영령들도 크게 제사를 올려 위로한 뒤 울며 다짐했다.
“만일 하늘이 도와 과인이 천하를 평정하면 이들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사철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게 하리라.”
그걸 보고 있던 장상(將相)과 사대부들까지 새삼 옷깃을 여미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지사(志士)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알아주는 주군을 만났으니, 간과 뇌를 쏟아 땅을 덮고 죽은들 아깝고 두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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