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다. 이만하면 한번 군사를 내어 항왕과 겨뤄볼 만하다. 반드시 싸워 이기지는 못한다 해도 이 지긋지긋한 에움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어두운 표정이 되어 한탄하듯 이었다.
“하지만 초나라 군중에 붙잡혀 계시는 아버님 어머님 때문에 그도 어렵겠구나. 실로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한나라 군중(軍中)에는 육고(陸賈)란 막빈(幕賓)이 있었다. 육고는 초나라 사람으로 유자(儒者)였으나 구변이 좋아 늘 한왕 곁에서 일했다. 그 육고가 세객(說客)을 자청했다.
“신이 항왕을 찾아보고 태공(太公) 내외분과 왕후마마를 돌려보내도록 달래 보겠습니다.”
원래 한왕은 유자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입만 살아 있는 나약한 자들이라 하여 그 관에 오줌을 누며 짓궂게 놀린 적도 있을 만큼 유자를 얕보았다. 하지만 기신과 주가가 자신을 위해 죽은 뒤로 한왕은 그들을 달리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역이기가 제나라에서 삶겨 죽은 뒤부터는 유자를 함부로 대하는 일이 아예 없어졌다.
“그 미련하고 사나운 항왕이 공의 말을 들어 주겠는가?”
오히려 걱정하는 눈으로 육고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육고가 늠름하게 대답했다.
“비록 인욕(人慾)의 검은 구름에 가려져 있으나 항왕에게도 보름달같이 밝고 이지러짐 없는 본성(本性)이 있을 것입니다. 오상(五常)의 이치 가운데 으뜸인 효(孝)로 달래 인욕의 검은 구름을 걷어내면 본성의 제월(霽月)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미련하고 사나운 항왕이라 하나 어찌 성현의 가르침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다음날로 말 한 필에 시중꾼 하나만을 딸린 채 초나라 진채로 갔다. 평소 그의 능란한 언변을 잘 알고 있는 한왕은 걱정스러운 대로 한 가닥 기대를 걸고 패왕에게 보낼 예물을 갖춰 육고를 보냈다. 육고가 초나라 진채로 가는 까닭을 아는 한나라 장졸들도 그가 태공 내외와 여후를 무사히 되찾아오기를 한결같이 바랐다.
그런데 한 사람 싸늘한 눈초리로 그런 육고를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산양(山陽)에서 온 후성(侯成)이란 사람으로, 육고처럼 한왕의 막빈이었다. 후성은 자(字)를 백성(伯盛)이라 썼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그를 후공(侯公)이라 불렀다. 그날도 일없이 진중을 어슬렁거리다가 진문을 나서는 육고의 뒷모습을 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 덜된 선비놈이 제 잘난 척 우쭐거리며 충신효제(忠信孝悌)를 떠들다가 공연히 풀숲을 건드려 뱀만 놀라게 하겠구나. 세 치 혀만 믿고 나서는 모양인데, 그 혀나 성하게 돌아와도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졸이 있어 가만히 장량에게 전해 주었다. 듣고 난 장량이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이졸을 단속했다.
“육고에게는 육고의 수단이 있을 터, 두 번 다시 후공이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둘 사이를 이간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는 한왕과 함께 육고의 일이 어찌 되는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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