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테러리스트 나석주. 그는 1920년대에 ‘5파괴(五破壞) 7가살(七可殺)’을 내세웠던 비밀결사체 의열단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나 열사는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백주에 표적을 겨누었다. 조선 민중의 원부(怨府)였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거푸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과 직원을 사살하였다.
폭탄은 비록 불발에 그쳤으나 그것은 민족의 한을 씻어 준 격정의 한마당이었다.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投彈)과 함께 의열단 최대의 의거로 꼽힌다.
마지막 남은 탄환으로 자결하니 그의 나이 서른넷.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나석주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설립한 양산학교를 다니며 일찌감치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그와 백범의 인연은 깊다. 그 이듬해 중국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 경호원으로 잠시 몸담았는데, 그때 경무국장이 백범이었다. 백범은 그를 “제자이자 동지”(‘백범일지’)라 불렀다.
1925년 나석주는 톈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공포단(恐怖團)’이라 불리던 의열단에 가입한다.
그의 의거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유림단(儒林團), 그리고 의열단의 합작이었다. 좌우(左右) 이념과 신구(新舊) 세력의 일대 결집이었다.
당시 유림단 의거를 진행하던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은 백범과 머리를 맞대었다. “일제의 침탈이 극악해져 동포들의 민족정신이 소침(消沈)하니 비상한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오. 지금이야말로 민족혼의 횃불을 지필 때요!”
이렇게 해서 백범이 키운 군사요원은 심산의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게 된다. 당시 의열단은 비밀결사의 틀을 벗고 대중 조직에 기반을 둔 무장투쟁 노선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으니 나 열사의 의거는 의열(義烈)투쟁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순국 후 그는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됐다. 유족이 유해를 수습해 고향에 묻었다고 하나 일제의 감시로 어떤 표지나 봉분도 만들지 못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되 아들이 일찍 사망해 직계 후손마저 끊겼다.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던 심산의 말이 뼛속까지 시리게 와 닿는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10년, 가정도 생명도 불고(不顧)하였노라….”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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