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 쏟은 2년… 29일 개봉 '청연' 주인공 장진영

  • 입력 2005년 12월 29일 03시 01분


고소 공포증이 있어 평소 놀이기구 근처엔 얼씬도 안 한다. 그런데 조종석의 덮개도 없어 찬 공기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휘감는 구식 복엽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치솟아야 했다. 집안에 틀어박혀 책 읽기와 요리하기를 즐기는 ‘혼자 놀기’의 대가임에도 2년에 걸쳐 짐 싸고 풀기를 되풀이하면서 마치 유목민처럼 미국 일본 중국을 오가야 했다.

영화 ‘청연’(감독 윤종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인 박경원 역을 맡은 배우 장진영(31)이 그랬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항공 촬영 영화, 순제작비 97억 원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의 단독 주인공을 여배우가 맡았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은 영화다. 일제강점기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라서 친일이니 뭐니 인터넷에선 영화 외적인 논란으로 시끌시끌했다.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간 이런저런 마음고생이 많았겠다고 말을 건네니 뜻밖에 그는 덤덤하다.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쏟아 부은 이후의 평온함 같이 보였다.

“이제 다 제 손을 떠난 거고… 흥행 부담은, 솔직히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저 때문이 아니라 제작 준비 기간까지 합쳐 꼬박 3년 동안 이 작품 하나만을 위해 살아 온 감독님의 열정에 대한 보상이 꼭 이뤄졌으면 해요.”

장진영을 배우로서 주목받게 한 ‘소름’을 통해 처음 만난 윤 감독에 대한 그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진 않지만 한번 좋은 인연을 맺으면 오래, 깊이 빠지는 성격 때문이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면서 한 장면 한 장면 힘들게 촬영한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래도 가장 애틋했던 것은 영화가 끝난 뒤 정들었던 제작진의 이름이 자막에 차례로 올라가는 순간이었어요.”

낯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나긴 해외 로케이션과 악천후 속의 항공 촬영까지, 영화 속에는 배우와 제작진의 땀과 진심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하루 10시간씩 360도 회전하는 복엽비행기와 한몸이 된 상태에서 고통스러운 비행 훈련을 감당한 장진영의 전력투구, 혼신을 다한 연기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구름 위로 급상승했다 급강하하느라 얼굴 근육이 이지러지고, 퍼붓는 빗속을 뚫고 산맥을 넘고,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고…. 장면마다 꿈을 위해 자신을 소진하는 한 여자의 시퍼런 집념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나의 한계와 싸우는 도전이었습니다. 박경원으로 살면서 많이 배웠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게 됐어요. 전 꿋꿋하지도 않고요. 쉽게 포기하고 깊이 좌절하며…, 기피가 아니고요(웃음). 그다지 긍정적인 사고도 아닌 것 같고. 열일곱 살의 나이로 혈혈단신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11년 만에 비행사 자격증을 따낸 박경원은 역경 속에서도 오직 꿈을 위해 돌진하잖아요. 저와 추구하는 게 달라서 그런지, 부럽기도 하고 내심 걱정스러웠죠. 그런 절실함, 억척스러우면서도 밝은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게 고민이었거든요.”

그의 이러한 생각은 기우 같다. 새처럼 하늘을 날겠다는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모든 걸 내던졌던 한 식민지 여성의 비극적 삶은 장진영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으로 되살아난다.

“간절하게 꿈을 추구하고, 절실하게 사랑했던 한 여자를 보면서 관객들이 꿈과 사랑의 갈증을 채울 수 있었으면, 강하게 살고 싶다는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 ‘청연’은 어떤 영화

하늘을 향한 동경과 애절한 사랑을 두 개의 축으로 엮은 영화 ‘청연’. 사진 제공 영화인

100억 원 가까운 돈을 들여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 4개국에서 촬영된 영화 ‘청연’은 이야기와 볼거리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특히 국내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미개척 분야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둬 낸 제작진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는 실존인물인 여류 비행사 박경원(장진영)의 하늘을 향한 동경, 가상인물인 기상 장교 한지혁(김주혁)과의 사랑이란 두 개의 축으로 펼쳐진다. 당연히 영화에선 배우들 못지않게 비행 장면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한국 영화 최초의 항공 촬영 작품임에도 모형기가 아니라 실제 복엽기를 띄우고 찍은 비행 장면에서는 사실감이 느껴지고 박진감이 넘친다. 특히 박경원이 승리를 이끈 전일본비행대회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고국으로의 마지막 장거리 비행 장면은 압권. 1930년대 일본 시가지와 의상을 공들여 재현해 낸 것도 시각적인 포만감을 안겨 준다.

이런 스펙터클 외에도 박경원과 한지혁의 로맨스 등 드라마도 탄탄하고 연출력이나 배우들의 연기도 출중하다. 그럼에도 강약을 두지 않고 모든 장면에 공을 들이고 힘을 준 탓일까. 전반적인 영화적 완성도에 비해 대중과 소통하는 힘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아쉽다. ‘영웅이 아니라 남다른 꿈을 가진 한 인간을 그리고자 했다’는 감독의 말이지만 항일도, 적극적 친일도 아닌 박경원의 모호한 시대의식도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될 듯. 29일 개봉. 12세 이상.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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