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신작소설 '지하실', 과거사 청산에 대해 묻다

  • 입력 2005년 12월 29일 03시 01분


“지하실을 되살려 놓으면 지금까지 잊고 지내온 험한 내력을 모두 되살려놓는 일 아니겠어? 그래서 새삼 동네 사람들 마음을 이쪽저쪽 갈라놓으면 무슨 좋은 노릇 생기겠어?”

작가 이청준(67) 씨가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지하실’에서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문제들을 정교하게 은유했다. 올해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원로 문인의 고민과 시각이 담긴 작품으로 문단 안팎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 정부 출범 후 과거사 청산 문제가 끊임없이 논란이 됐지만 올해 들어 본격 문학작품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것은 이 씨의 ‘지하실’이 사실상 처음이다. 이 씨는 소설 등장인물의 발언을 통해 과거사 파헤치기가 어떤 상처를 입힐 것인지를 짚고 있다.

이 소설에는 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좌우익 갈등이 격심했던 시절,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농가의 은밀한 지하실에 차례로 은신했던 지주와 인민위원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월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이 농가를 개축하려 하는데, 매몰된 지하실까지 복원해야 하느냐 하는 어려운 질문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과거사 청산’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문학평론가 우찬제 서강대 교수는 “문학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천착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하실’은 본격 소설 문학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 씨는 28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하실’은 고향인 전남 장흥군 대덕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겪었던 일을 기반으로, 상상을 더해 만든 작품”이라고 밝혔다.

“우리 고향에선 남북 측 병력이 번갈아 왔다 간 뒤면 주민들한테 애꿎은 피해가 생기곤 했습니다. 한 여인은 우익으로 몰려 생매장돼 죽기 직전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어요. 인민위원장을 했던 사람 역시 ‘대한민국 만세!’ 하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나약한 인간들입니까. 그 사람들한테 무슨 거창한 신념이 있었겠습니까? 하나하나 살펴보면 억울하고 불쌍한 데가 있지요. 국가는 종종 ‘거대 명분’을 내세우지만 거기 휩쓸려야 하는 백성들은 얼마나 살기 힘듭니까.”

이 씨는 “올해 장흥군청이 문학 관광객들을 위해 (내) 생가를 손보았는데,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지하실이 무너진 것을 알게 됐다”며 “그곳에는 어린 시절 마을에서 가장 넉넉했던 집안 어른이 (좌익의) 위협을 피해 은신한 내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과거사의 청산과 규명의 어려움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일들 가운데는 후문만 남고, 당사자들이 숨져 진실은 결국 규명하지 못한 채 다시 편 가르기 하거나 상처만 크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 현대사가 너무 격동의 세월이고, 번갈아 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겼던 면이 있습니다. 너무 피해자 입장만 강조하다 보면 도를 넘어버릴 수가 있지요. 서로 ‘뉘우치는 가해자’의 정서를 가져야 긴 화해의 길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친일과 부역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 그는 “그 같은 과오만으로 당사자에 대한 평가가 종결되기보다는 그 뒤에 속죄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삶을 살았는지 역시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삼가며 작품으로만 말해 온 이 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순정하고, 정의로운 역사뿐 아니라 오욕스러운 것까지 함께하고 있지요. 현대란 그냥 그렇게 흘러온 게 아니라 그걸 극복하고 소화해 온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문학은 선악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 씨의 이번 작품은 역사 속의 진실은 겉에 드러난 것만으로 재단할 수 있는 그런 단선적인 것이 아님을, 중층적인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와 접근이 중요함을 보여 준다는 게 문단의 평가다.

문학평론가 장은수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지하실’에 대해 소상히 소개하고 “우리는 과연 과거에서 진실을 되살려 낼 수 있는가, 그런 행위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한 한 마을의 뼈아픈 역사가 만들어 낸 이야기와 함께 이런 묵직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 '지하실'의 어제 그리고 오늘

―일제강점기 아버지는 그 비밀 지하실에 곡물 가마며 소중한 그릇, 더러는 밀주 따위를 숨겼다.

―광복 후 좌우 갈등이 심하던 때 마을에서 가장 살림이 넉넉한 종가 어른. “나 오늘 밤 이 집 지하실 신세를 져야겠다. 살아나면 신세 잊지 않을 게니.”

―죽창들을 끌고 온 병삼 씨 목소리. “나를 따라 이리 와. 이 집은 내가 다 아니께 다른 덴 볼 것 없고!”

―인민군이 달아난 뒤 그동안 ‘마을 인민위원장’이었던 윤호 아버지. “놀랄 것 없다. 오늘 이 집 지하실에서 목숨을 부지해 볼까 했더니, 차마 못할 노릇 같아 그냥 간다.” 잠시 후 그를 처형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세월 지나 예순 살을 넘긴 지금의 나, 고향 마을 형님에게. “어때요? 저 지하실 다시 살려내는 게. 기왕에 이 집을 옛날 모습대로 되살려 보려면.”

―고향 마을 형님. “저 지하실을 이제 와서 되살려 놓으면 그거야말로 지금까지 잊고 지내온 이 동네 험한 내력을 죄다 살려 놓는 일 아니겄어?” “세상일이란 사람 따라 세월 따라 다 그렇게 달라 보이는 법이여! 지난 일이 그리 소중하다면 내일 또 지난 일이 될 오늘 일이 우리한텐 더 소중하니께 말여.”

■ 이청준 씨는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뒤 1965년 ‘사상계’에 단편소설 ‘퇴원’을 발표함으로써 문학 활동을 시작해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대표 장편인 ‘당신들의 천국’을 비롯해 중편 ‘소문의 벽’ ‘잔인한 도시’, 영화화된 ‘축제’ ‘서편제’ 등 수백 편의 작품을 써 왔다. 세상의 이면을 포착하고, 관념을 뽑아내면서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걸출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인촌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소설의 줄거리

나는 십대 중반에 고향을 떠난 뒤 이제 예순을 훌쩍 넘었다. 고향집을 떠올리면 그간의 각박한 객지 생활을 보상받는 듯한 활력을 얻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남의 손에 넘어간 데다 무너져, 붉은 녹물 든 철제 대문만 눈에 잡힌다. 장성한 아들이 이런 내 아쉬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 집을 다시 사들였는데, 손을 봐 주기로 한 집안의 형님 성조 씨는 이상하게 지하실 복원을 꺼린다.

이 지하실은 일제 말기에 방공호와 함께 몰래 만들었던 부엌 옆 지하 밀실이었는데, 참 사연이 많았다.

좌우 갈등이 격심했던 시절의 어느 저녁, 마을에서 살림이 가장 넉넉했던 종가 어른이 (좌익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 우리 식구는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마을 머슴살이를 하던 병삼이 죽창 든 일행을 끌고 와 수색에 나섰다. 병삼은 곧장 지하실을 지목하고는 직접 살펴보다가 “없어. 없는 것 같어” 하고 외치며 철수하고 만다.

그 후 전쟁이 나고 세상은 바뀌었다. 좌익이 득세했던 때에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내 친구 윤호의 아버지는 마을이 수복된 뒤 우익에 쫓기다가 우리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여기 숨어 있자니, 차마 못할 노릇 같아 그냥 간다”며 동네 회의장에 스스로 나가 총살당한다.

그리고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윤호의 집을 찾아갔었다는 이야기도 이제야 듣게 된다. 성조 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그 집은 사람을 잃은 상가(喪家)였으니께. 상가에는 이웃이 밤을 새워 주는 게 도리고. 상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따뜻이 대접하는 게 인사니께. 우린 그렇게 살아왔어!”

성조 씨는 또 놀라운 일을 털어놓는다. “왜 병삼 씨가 앞장을 섰겄어? 자기가 먼저 은신처를 아는 척 바로 지하실 입구를 가로막고…사람이 있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허드레 물건들을 이리저리 밀쳐서 통로를 가려 버린 것이었어.”

하지만 내 어머니는 병삼 씨가 그런 줄도 모르고 평생 데면데면한 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병삼 씨도 끝내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한 채 몇 해 전 숨지고 말았다.

성조 씨는 윤호 아버지가 우리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제 발로 나와 죽음의 길을 걸어간’ 이유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억측을 품어 왔다는 사실도 말해 준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은 만약 나나 식구들이 들었다면 ‘억울해서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할 것’(밀고·密告)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그 문제를 들춰내기보다 같이 살아남은 이웃으로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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