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원인 김상옥(金相玉)은 1922년 5월 유일한 여성 동지 장규동을 잃었다. 국내에서 김상옥의 행방을 묻는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 때문에 깊은 병이 들었던 그녀. 병세를 호전시키려고 상하이로 데려온 지 1년도 되지 않아 그녀가 영영 떠난 것이다.
백범 김구(金九)가 그녀의 장례 비용을 전해 왔다. 그 돈을 들고 시내로 나간 김상옥은 ‘관(棺)’ 대신 ‘권총’을 사 들고 돌아왔다.
“사랑하는 내 동지를 죽인 것은 병마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다. 바로 일제의 경관들이다.”
그는 권총 4정과 실탄 800발, 폭약을 지니고 국내로 잠입했다.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 10분경. 항일 독립투사들을 가장 많이 체포하고, 가장 악랄하게 고문했던 종로경찰서의 서쪽 창문으로 폭탄이 날아들었다. 일본 경찰과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등 10여 명이 크게 다쳤다.
그것은 김상옥이 단신으로 일제 경찰과 벌인 ‘서울 시가전’의 서막에 불과했다. 17일엔 경성 삼판통(지금의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그를 체포하려는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4명을 살상했다.
닷새 뒤인 22일. 그는 종로구 효제동 일대에서 일제 무장 경찰 1000여 명과 3시간 넘게 격전을 치르면서 16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의 몸에도 어느새 10발의 총탄이 박혔다. 그의 목숨을 끊은 것은 11번째 총알. 그러나 그 11번째 총알은 김상옥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쏜 것이었고, 그가 지닌 마지막 탄환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듬해 한식 날.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아들의 허름한 무덤 앞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에그, 왜 왔더냐! 죽으러 왜 왔더냐! 거기(상하이)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왜 와서 영이별이 되었느냐!”
이틀 뒤인 1924년 4월 8일 동아일보 2면에는 이 한 많은 모정(母情)이 김상옥 의사(義士)의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죽으러 왜 왔더냐/묘전(墓前)에서 통곡하는 김상옥의 친모’라는 제목의 그 기사 끝 문장은 김 의사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묻고 있다.
“아! 가슴에 품은 그 뜻은 어디 두고 이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누웠느뇨.”
일제는 ‘범죄를 선동한다’며 이 기사를 즉각 삭제해 버렸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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