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벗들, 죽은 호랑나비를 물고 가는 개미, 직박구리와 민들레 같은 삼라만상이 이 노래하는 수탉의 눈동자에 비친 이야기감이다. 시인은 일상 속에 자체 완결된 소우주들을 발견하고 거기 깃들인 신성성(神聖性)을 노래한다. 고 씨는 목사지만, 그의 시에 걸맞은 것은 유일신보다는 오히려 각자 해탈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만물이 연기(緣起)로 이어져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인 것 같다.
시인은 황달에 걸린 아이의 잠든 얼굴을 고통스레 내려다보며 금빛 찬란한 부처를 보기도 하고, 사찰 앞뜰의 머위 잎에서 대웅전 부처님의 거름 같은 오줌을 떠올린다. 산불로 재만 남은 낙산사의 주춧돌을 보면서 ‘적멸궁’이라고 폐허를 위로한다. 그는 이윽고 한 성상(聖像)에서 종교들의 긴장마저 완전히 사그라진 원융(圓融)의 세계를 본다.
‘실버타운 유무상통 마을에 가면,//성당 입구에/미륵반가사유상처럼/오른쪽 다리 들어 왼쪽 무릎에 올려놓고/두 발과 두 손에 박힌 못 빼어 한쪽 손에 꼭 움켜쥐고/다른 쪽 손으로 턱 괴고/가시면류관 헐렁하게 쓰고 앉아/눈웃음 짓고 있는 목조예수상이 모셔져 있지요.//한 몸뚱이에 붓다와 예수가 동거하는 저 상(像)에서/(…)/합장한 두 손이 춤 멈춘 꽃잎처럼 이뻤어요.’(‘합장’ 가운데서)
시인은 자기가 모시는 신에 대해 ‘범신론이든/유신론이든/(…)//내가 믿는 하느님은/그런 …論의 그물에 걸릴 분이 아니라니까요.’(‘어떤 인터뷰’에서)라고 밝힌다.
그럼 그의 신학은 어떤 것인가. ‘어떤 형상과 문법과 경계도 고집하지 않는/구름 속을 드나들었다 이젠/구름 신학이다!’(‘구름과 놀다’에서)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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