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작업의 정석’ ‘싸움의 기술’-이성유혹 가요 히트

  • 입력 2006년 1월 16일 03시 05분


대중문화에 불고 있는 ‘노하우’ 열풍은 빛과 그림자의 양면을 갖고 있다. 매뉴얼이나 레퍼런스 같은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의 상품 가치를 인정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동시에 ‘고수’의 세계를 동경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현대인들의 욕구 불만이 녹아 있는 현상인 것이다.
대중문화에 불고 있는 ‘노하우’ 열풍은 빛과 그림자의 양면을 갖고 있다. 매뉴얼이나 레퍼런스 같은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의 상품 가치를 인정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동시에 ‘고수’의 세계를 동경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현대인들의 욕구 불만이 녹아 있는 현상인 것이다.
“싸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서서 시작해서 누워서 끝난다고 할 수 있지. 개싸움 말고 진짜 싸움에선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기술, 그게 필요해. 옛말에 눈을 찌르면 호랑이도 쓰러진다는 말이 있어. 촉감을 느끼는 기관 중 가장 예민한 곳…. 눈이란 말이야. 눈! 팍팍!”

무협지의 한 대목이 아니다. 5일 개봉해 12일까지 전국에서 79만 명이 관람한 한국영화 ‘싸움의 기술’ 중 한 장면이다. ‘실용 액션’이라는 전대미문의 단어로 장르를 규정한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실용 기술’들을 사용 설명서처럼 늘어놓는다.

○싸움 연애 설득 등 실용지침 콘텐츠 ‘접수’

영화 속에는 △500원짜리 동전을 인중에 던져 상대를 녹다운 시키는 방법 △의자 필통 화분 쓰레기통 모래 등 주변 기물을 이용하는 방법 △형광등을 이용하는 방법 △벗은 양말 속에 음료 캔을 집어넣어 무기로 사용하는 방법 △멱살 잡혔을 때 역공하는 방법과 함께 병을 흉기로 사용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깨는 방법까지 ‘비기(秘技)’가 세세히 열거된다. 극 중 사부인 판수(백윤식)는 “싸움에는 반칙이나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 그 자체가 싸움인 거야” “네 안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 맞아 본 자의 두려움을 날려 보내야 돼” 등과 같은 ‘고수’의 한마디를 툭툭 던지면서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노하우’가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를 ‘접수’하고 있다. 싸움이나 연애(섹스), 인생 성공과 같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이나 노하우를 담은 영화와 가요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이들 상품은 대부분 ‘∼하는 법’ ‘∼하기 위한 법칙’ ‘∼의 기술’과 같은 단도직입적인 제목을 달아 ‘목적 달성을 위한 실용적 지침’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22일 개봉된 코믹 멜로 영화 ‘작업의 정석’도 마찬가지. ‘작업은 과학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죽은 애인’이나 ‘가난했던 과거’를 들먹이며 상대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방법(“그녀가 죽은 후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어요”) △‘느끼한’ 방법으로 상대를 사로잡는 방법(“오늘은 마법이 안 통하겠네요. 벌써 제 눈앞에 요정이 있으니까”) △내숭으로 상대에게 깔끔하게 다가가는 방법(“회는 원래 세 점 이상 먹는 게 아니래. 아! 와인 한잔 했으면 좋겠다”) 같은 각종 ‘연애 필살기(必殺技)’를 늘어놓는다. 이 영화는 12일까지 223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다.

‘노하우’의 홍수는 섹시미를 앞세우는 유니, 빈 등 여가수들의 노래 가사에서는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유니의 최근 히트곡 ‘콜콜콜’은 ‘차가운 얼음 같은 미소, 너무도 부드러운 손길, 도도히 살짝 얼린 입술’처럼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들을 ‘내게로 빠져드는 기술’ ‘남자를 갖고 노는 기술’로 열거한다.

○정보 공유 욕구와 지식 오락화 맞물린 신(新)트렌드

또 빈의 ‘2:00 am’에는 ‘steppin(다가오기), Kissin(키스하기), down with me(함께 엎어지기), come and get me(와서 나를 갖다), jumpin(뛰기), shake it(흔들기), pumpin(펌프질하기), bounce(탄력 있게 튕기다)’ 같은 노골적인 영어 가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남자를 유혹해 목적(?)을 달성하기까지의 각종 신체 행위들이 단계별로 조곤조곤 제시되는 것.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영화평론가 심영섭(심리학 박사) 씨는 “전문 지식을 적극적으로 올린 누리꾼들이 포털 사이트에서 ‘지식의 전당’에 오르고 추앙받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식을 공유하고 구체적인 레퍼런스(참조사항)와 매뉴얼(설명서)의 상품적 가치를 인정하게 된 세태가 문화에 적극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일상에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고수’의 세계를 판타지로 삼아 동경하고 ‘선수’들의 노하우에 애착을 보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엔터테인먼트가 구체적 지식과 결합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담은 오락물’로 상품화하는 ‘인포테인먼트(information+entertainment)’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최근 몇 년간 출판계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설득의 심리학-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6가지 불변의 법칙’ ‘4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등 성공이나 설득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노하우를 담은 실용서적들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노하우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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