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꼴이 좋지 않으면 좋은 사진과 그림으로 디자인된 신문 책 잡지도 멋진 지면을 선보이기 어렵다. 그래픽 디자인에서 글꼴은 건축의 기둥처럼 기초와 같은 것이다.
석금호(50·산돌커뮤니케이션 대표·사진) 씨는 1970년대 말부터 한글 타이포그래피(글꼴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디자이너다.》
○ 한글 글꼴의 산실
2003년 삼성그룹이 전용 폰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한글에 대해 애정이 깊었던 이건희 회장이 더 아름다운 글꼴로 된 보고서를 받아 보고 싶다고 한 게 계기였다.
이 프로젝트는 한글과 한자 등 10만 자를 디자인해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의 글꼴 디자인 회사로 선정된 곳이 석금호 대표의 산돌커뮤니케이션이다. 이 프로젝트는 아직 계속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일간지 전용 서체도 개발한 바 있는 산돌은 2002년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식 글꼴업체로 등록돼 차세대 윈도 운영체제인 윈도 비스타의 한글 서체를 개발하고 있다. 이 서체는 윈도의 기본 메뉴를 포함해 오피스 등 여러 프로그램의 기본 서체로 사용된다.
산돌이 개발한 서체들은 컴퓨터 잡지 책 광고 간판을 통해 우리 눈에 매일 비치고 있다. 산돌의 이런 실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 성과 뒤에는 고난의 시절이 있었다.
○ 2350자 모두 바꿔야
한글 서체 개발은 영어에 비해 단순하지 않다. 영어는 알파벳 대소문자 52개의 서체를 개발하면 된다. 그러나 한글은 영문처럼 풀어쓰기가 아니라 모아쓰기이므로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 수많은 글자 조합을 낳는다. 한글의 경우 하나의 서체를 개발하려면 2350개에 이르는 글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석 대표가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딘 1978년만 해도 한국의 글꼴 산업은 척박했다. 한글 사진 식자기를 일본 활자 주조 회사인 모리사와와 샤켄에서 수입해 사용했다. 컴퓨터가 출판에 도입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사진 식자기로 인쇄했는데, 그 설비를 일본에서 수입했던 것이다. 석 대표는 이 현실에 충격을 받고 평생을 한글꼴 연구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또 지면의 가독성이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글자 크기를 비롯해 자간이나 행간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었다. 석 대표가 이상철 김진평 안상수 손진석 씨 등 한글꼴 디자인의 개척자들과 함께 한글 타이포그래피 연구에 매진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84년 회사를 설립한 석 대표는 글꼴 디자인에 대한 관심만 가진 채 표지 디자인 등으로 경비를 조달해야 했다. 글꼴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자를 면치 못해 초기 3년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한 것은 디자인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 글꼴은 정신을 담는 그릇
컴퓨터가 대중화된 1990년대 초반 이후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컴퓨터를 통한 출판물이 급증하면서 서체 시장이 급성장했고 글꼴 디자인 수요도 크게 늘었다.
석 대표의 산돌은 21년간 250여 종의 서체를 개발했다. 이 중 제비체 광수체 등 히트작도 여럿 있다. 1989년에 1000만 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2004년에는 23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 매출액은 일의 중요도에 비하면 많지 않은 금액이다. 디자이너가 투자하는 노력에 비해 높은 값을 받지 못하는 글꼴 디자인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글꼴은 쉽게 복제되기 때문에 부가 가치를 얻기도 어렵다. 그러나 석 대표는 “글꼴 디자인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평생 짊어진 사명”이라며 “글꼴은 정신 세계를 담는 그릇이다. 글꼴 디자인을 보면 문화 성숙도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석 대표는 산돌을 찾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글꼴 강의를 해 주고 있다. 국제 타이포그래피 콘퍼런스도 개최할 예정이다. 글꼴 문화를 전파하고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발전시키기 위한 투자의 일환이다.
글=김 신 ‘월간 디자인’ 편집장 kshin@design.co.kr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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