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 몸 이야기]<19>소리꾼의 목

  • 입력 2006년 1월 2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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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는 득음의 경지에 대해 “오음(五音)을 분별하고 육률(六律)을 변화하여 오장(五臟)에서 나는 소리를 농락해 자아낼 제 그 또한 어렵구나”라고 표현했다. 사진은 안숙선 명창. 동아일보 자료 사진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는 득음의 경지에 대해 “오음(五音)을 분별하고 육률(六律)을 변화하여 오장(五臟)에서 나는 소리를 농락해 자아낼 제 그 또한 어렵구나”라고 표현했다. 사진은 안숙선 명창. 동아일보 자료 사진
‘피를 토하며 득음(得音)의 경지에 올랐다.’ ‘인분 삭인 물을 마시며 목을 달랬다.’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에게 종종 뒤따르는 일화다. 이런 (끔찍한) 과정을 겪어야만 과연 명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국립국악원과 국립창극단의 국악인 4명에게 물어봤다. “피를 쏟으셨나요?” 이들의 대답은 모두 “아니요.”

‘판소리 발성법’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쓴 국립창극단원 왕기철 씨는 “옛 명창들은 피를 토해가며 수련했지만 그래야만 명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피 토하는 지경까지 갔다가 회복이 안 되면 영영 목을 못 쓰게 될 위험이 크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창’이라는 말도 다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의학적으로 보면, ‘득음’은 ‘절묘한 성대 결절’이다.

예송이비인후과 음성관리센터의 김형태 원장은 “득음했다는 명창들의 성대를 보면 진동이 가장 많은 앞에서 3분의 1쯤 되는 지점에 한쪽은 튀어나오고 한쪽은 들어간 모양의 ‘볼 앤 소켓(Bowl and Socket)’ 결절이 있다. 명창의 힘차고 시원스러운 고음은 바로 이 두 부분이 정확히 들어맞으면서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목’의 조건 중 하나는 상하청(높은 음과 낮은 음)이 잘 나야 한다는 것. 서양 오페라 곡들은 보통 음역이 두 옥타브를 넘지 않지만 판소리는 세 옥타브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성악 발성은 소리를 공명시켜 인위적으로 곱게 뽑아내지만, 판소리는 목을 통해 자연스럽게 낸다. 소리를 찍어 내고(찍는목), 굴려 내고(방울목), 깎아 내고(깎는목), 휘어잡아 올리는(뽑스린목) 등 여러 ‘목’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목소리가 쉬었다 풀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원래 타고난 자신의 목소리 대신 더 두껍고 걸걸한 목소리를 갖게 된다.

판소리에도 여러 성음(음색)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하늘이 내린 소리’라는 뜻의 맑은 ‘천구성’과 연마 끝에 얻어지는 거친 ‘수리성’을 최고로 꼽는다. 이론가들은 대개 ‘천구성’을 ‘수리성’ 위에 놓는다. 하지만 많은 소리꾼은 ‘후천적 수리성’을 더 친다.

4대째 소리를 하고 있는 정회석 명창은 “직접 소리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타고난 고운 소리를 연마한 천구성보다는 아무래도 곰삭은 수리성을 꼽게 된다. 그런 깊은 소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힘든 수련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얼굴에 그늘이 있다’는 말과는 달리,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말이 소리꾼들에게는 최고의 칭찬인 이유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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