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재임 시절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다. ‘인권 대통령’을 자처하며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금리 상승 등 경제정책의 실패로 불만이 쌓인 국민에게는 ‘무능력한 이상주의자’로 비칠 뿐이었다.
결정타는 1979년 말 이란 학생들의 테헤란 미 대사관 직원 인질사건이었다. 53명의 미국인이 인질로 잡혔으나 카터 대통령은 이란 혁명정부와의 직접 접촉을 피하는 등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이듬해 마지막 카드로 꺼내 든 특공대 투입작전의 실패는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완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7년 1월 19일 취임 이후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분쟁을 조정한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1978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1979년), 소련과의 전략무기 제한 협상 등 굵직한 외교 성적은 ‘표’와 ‘인기’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하지만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그의 인생 반전이 시작됐다. 퇴임 대통령의 편안한 노후를 거부하고 세계평화의 전도사로 팔을 걷어붙인 것.
1982년 고향인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에모리대에 세운 ‘카터센터’는 분쟁 종식, 민주주의 실천, 인권 보호, 질병 및 기아 퇴치 활동에서 대표적인 비정부기구로 자리 잡았다.
세계 분쟁지역을 찾아 직접 발로 뛰어다니기도 했다. 가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를 찾아 질병 퇴치를 위한 정책 개발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호소하고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선진국의 관심을 유도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2002년 노벨위원회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겼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뒤 수십 년 동안 국제분쟁을 중재하고 인권을 신장시키며 경제사회 개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공로를 인정했다”는 게 선정 사유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한반도에 핵 위기로 전운이 감돌던 1994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 당시 합의된 남북정상회담은 성사 직전 김일성(金日成) 북한 주석의 사망으로 불발되긴 했지만 1차 북한 핵 위기 해결의 단초가 됐다.
무주택자를 위해 국제 해비타트에서 펼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2001년에는 충남 아산에서 자원봉사활동을 벌였다.
지금도 그는 지구촌 어디에선가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벽돌을 쌓고 페인트칠을 하면서 아름다운 황혼을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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