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사람들은 그를 ‘폭군’이라 말하지만 칼리굴라만큼 즉위 초와 사망 후의 평가가 상반된 인물도 드물 것이다.
25세인 서기 37년 즉위한 칼리굴라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오죽하면 유대인인 필로가 당시 분위기에 대해 “행복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문을 열고 그 행복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까지 말했을까.
그는 젊었고(전임 티베리우스 황제는 79세에 타계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혈연관계인 까닭에 정통성도 탄탄했다. 요절한 그의 아버지는 제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로마 군단병으로부터 흠모에 가까운 사랑을 받았고 이 흠모는 고스란히 칼리굴라에게 이어졌다. 게다가 제국은 초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2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선정으로 반석 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평가가 ‘폭군’으로 뒤바뀌어 암살까지 당하게 되는 데는 3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60여 년에 걸쳐 쌓은 제국의 부는 단 3년여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칼리굴라가 각종 오락과 스포츠를 시민에게 제공하느라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리저리 돈을 변통해서 구멍을 메웠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는 지출을 줄일 수도 없었다. 시민의 지지를 계속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정 파탄을 벗어나는 길은 수입을 늘리는 것뿐이었다. 즉 세금 인상이다.
암살 직전의 그의 인기는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밀의 무상 배급과 검투 경기 같은 인기 정책이 계속됐지만 ‘땔감’에 대한 세금 부과 등 증세가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공짜 혜택은 즐기면서도 과세에 대해서는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리굴라는 결국 군대를 출동시켜 시위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시대에 황제 암살이 빈번했던 것은 문명이 미숙해서거나 선거로 낙선시킬 방법이 없어서는 아니었다고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말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어서 그 한 사람만 제거하면 정치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기(표)를 얻기 위해 충분한 준비도 없이 정책을 실행하고, 재정 악화를 부정하다가 결국 세금 인상으로 봉합에 나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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