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75>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1월 26일 03시 00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속임수는 무슨 속임수냐? 이 허허 벌판에다 대군을 숨기겠느냐, 불을 지르고 물을 가두겠느냐? 거기다가 우리 대왕께서 10만 대군으로 뒤따라오시는데 겁날 게 무엇이냐?”

번쾌가 핀잔하듯 그렇게 받으며 그대로 군사를 몰아나갔다. 같은 일은 한왕의 황옥거(黃屋車) 부근에서도 일어났다. 번쾌가 무턱대고 적을 뒤쫓아가는 걸 보고 수레를 몰던 하후영이 한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쇠를 쳐서 번(樊) 장군을 불러들이지요. 적의 매복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느긋하기만 했다.

“과인은 벌써 다섯 해째 항왕과 맞서 싸워 왔고, 예전에는 한편이 되어 싸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항왕이 잔꾀를 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언제나 허허실실로 자신의 용력과 장졸들의 기세에 의지해 치고들 뿐이었다. 범증이 살아 있고 한신과 진평이 곁에서 거들어 준다면 모를까, 그 혼자서는 결코 그런 계책을 꾸미지 못한다. 아마도 방금 나왔다가 달아난 것은 적의 선봉이 아니라 뒤를 끊는(단후·斷後) 부대일 것이다. 항왕은 형세가 불리함을 느끼고 달아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치 싸움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그대로 10만 대군을 몰아 들판을 덮듯 앞으로 나아갔다.

패왕 항우는 단기(單騎)로 산기슭에 나와 한군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그 본진까지 들판 가운데로 밀고 드는 걸 보고 지금까지 쫓기던 사람 같지 않게 기뻐했다.

“만약 저 누른 덮개 있는 수레에 정말로 한왕이 타고 있다면 이 싸움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북소리가 울리거든 모두 과인을 뒤따라 벼락같이 한군을 친다. 먼저 본진 가운데로 쪼개고 들어가 한군을 두 쪽 내고, 종리매와 환초의 군사들이 일어 적이 어지러워지면 종횡무진 쳐부순다. 거기에 다시 항양의 군사들이 돌아서서 우리 뒤를 받치면 적은 사나운 사냥개에 몰린 양떼나 다름없다. 십만이 아니라 백만이라도 우리 3만 정병에게 몽둥이 맞은 수박처럼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꼬나 쥔 철극(鐵戟)을 높이 쳐들어 숨어 있는 장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크게 함성이 일며 얕은 산그늘에 엎드려 숨어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몸을 일으키고, 나무 그늘 아래 감추어 두었던 기마대도 분분히 달려나와 패왕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나를 따르라. 오늘은 반드시 한왕을 잡아 천하를 우리 것으로 만들자. 이 싸움만 이기면 비단옷 입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운 부모처자와 함께 편히 살 수 있다!”

패왕이 앞장서 말을 달려나가면서 그렇게 외쳤다. 초군 1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함성을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패왕이 이끄는 초나라 군사가 먼저 맞닥뜨린 한군은 번쾌가 이끈 선봉 5천이었다. 신나게 항양을 쫓던 번쾌는 갑작스러운 함성과 함께 뛰어나온 초군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 군사를 숨기기 마땅찮은 야산이었는데 길을 막고 나서는 걸 보니 자기가 이끈 군사들보다 훨씬 많았다. 거기다가 앞장을 선 장수가 다름 아닌 패왕 항우임을 알아보자 번쾌는 독한 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홱 돌아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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