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건이 노예로 나온다는 건 그 자체로 쇼크다. 지저분한 산발 머리에다 잘생긴 얼굴에는 때 국물이 흐른다. 주인이 던져준 고깃덩이를 차지하기 위해 점프를 하고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요, 주인님!”한다(그나마 못 알아듣는 중국말로 해서 다행이다). 결정적으로 참을 수 없는 건, 그가 ‘주인님’을 등에 업고 엎드린 채 ‘네 발’로 뛴다는 사실이다.
‘미남’이 아니라 ‘배우’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장동건. 의당 도전할 만한 변신이겠지만, 보는 사람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까진 또 어찌하랴. 당신이 장동건의 충격적 변신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지금부터 영화 ‘무극(無極)’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시공간이 불분명한 미지의 대륙. 초인적 능력을 가진 노예 쿤룬(장동건)은 백전백승하는 장군 쿠앙민(사나다 히로유키)의 목숨을 구한 뒤 그를 보위하게 된다. 장군을 대신해 장군의 갑옷을 입고 왕궁으로 들어간 쿤룬은 왕비 칭청(장바이즈)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왕비를 위협하던 왕을 저도 모르게 죽이고 만다.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운명에 묶인 왕비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장군이라고 믿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쿤룬은 칭청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영화 ‘무극’의 키워드는 ‘운명’이다. 쿤룬은 자신에게 덧입혀진 노예의 운명을 거스르고자 하고, 왕비 칭청은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운명의 사슬을 끊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들에게 사랑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미국 공동 투자, 3000만 달러(약 300억 원)의 제작비, ‘패왕별희’를 만든 중국 첸 카이거 감독의 무협물, 게다가 한중일 대표 배우들까지 한데 모아놓은 ‘올스타 전’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분위기…. 이것만으로도 ‘무극’의 쇼윈도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이런 최고급 메뉴들을 전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무극’은 자살골을 넣고 만다. 이 영화는 차고 넘치는 컴퓨터 그래픽(CG)으로 비주얼의 융단폭격을 퍼붓지만, 그 틈에 영화의 키워드인 운명과 사랑의 부피는 비쩍 말라 들어가는 것이다.
‘무극’에는 비주얼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야말로 무극(無極·한계가 없음)이다. 수천 마리 소 떼가 병사들을 휩쓸고 지나가고, 쿤룬이 빛의 속도로 질주(물론 네 ‘발’로)하는 장면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역동성을 과시한다. 깃털 옷을 입은 칭청의 몸에 줄을 매단 쿤룬이 앞으로 내달으면서 칭청을 연처럼 ‘띄우는’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이상으로 탐미적이다.
문제는 이런 순간의 이미지가 영화의 서사구조 자체를 갉아먹어 버리면서 ‘멍’한 분위기로 변질된다는 데 있다. 신과 인간, 신화와 현실, 전설과 역사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영화는 ‘무극’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마치 시간이 정지되고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완벽한 ‘가상 세계’로 만들고자 한다. 영화는 이 가상 세계를 CG로 ‘도배’하는 과정에서 정작 인물들이 품었을 감정의 질감과 사연의 결을 가꾸는 데 소홀했던 것이다.
‘폭발’이라기보다는 ‘과잉’에 가까운 감정 표현, 인과율이 부족한 행위와 대사는 모두 질식할 만큼 광포한 시각효과에 가위눌려 정작 해야 할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지 못한 이 ‘골다공증’ 영화가 가진 슬픈 운명이 아닐 수 없다. 26일 개봉. 12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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