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대중의 의견을 측정하는 여론조사를 낳지 않았을까.
사상 첫 여론조사는 1824년 미국의 ‘해리스버그 펜실베이니안’지가 델라웨어 주 윌밍턴에서 제6대 대통령선거 후보들에 대한 지상(紙上)투표를 벌인 것. 독자들이 선호하는 후보를 적어 보냈다.
그로부터 한 세기 후인 1923년 5월.
동아일보도 지령 1000호 기념행사로 ‘가장 인망(人望)이 있는 현대 인물’에 대한 지상투표를 벌였다. 사실상 민족지도자에 대한 인기투표인 셈. 조선 민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신문이 전하는 당시 분위기.
‘도무지 없던 일이고 흥미가 극히 많은 새 시험이어서 일반사회의 기대가 심히 간절하다. 요사이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인물투표가 반드시 이야깃거리가 된다.’
1차 집계 결과 해외독립운동가 이승만(李承晩)이 49표로 1위. 그 뒤로 최린(崔麟) 25표, 안창호(安昌浩) 22표, 최남선(崔南善) 18표, 서재필(徐載弼) 17표, 이춘재(李春載) 12표, 이상재(李商在) 10표, 이동휘(李東輝) 7표, 여운형(呂運亨) 강일성(康一成) 각 6표, 이승훈(李昇薰) 김원봉(金元鳳) 등 각 4표, 김좌진(金佐鎭) 3표. 3·1운동 민족대표와 항일단체의 지도급 인사가 망라됐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일제 당국이 ‘치안에 방해된다’며 관련기사를 삭제해 버린 것. 여론조사도 중단됐다. 일제가 ‘결과 발표를 제한하겠다’고 하자 동아일보는 ‘그러면 투표의 공정성이 사라진다’며 반발했기 때문.
4년 뒤 1927년 11월. 동아일보는 현대인물투표를 재차 시도했다.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해외망명인사를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러자 여론조사의 부작용에 대한 여론이 제기됐다. 서울청년회는 ‘인물투표는 항일 유일전선을 구성하는 데 부적당한 만큼 중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결의했다. 화요회 북풍회와 함께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한 서울청년회는 1921년 1월 27일 공식 발족한 청년·사상 단체.
일본 도쿄(東京)의 조선인단체협의회도 비슷한 이유로 인물투표 반대 주장을 폈다.
그러나 당시 일반 대중은 이런 반대여론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투표 결과 역시 발표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모두의 생각과 의견은 제대로 그것을 조사할 수도, 발표할 수도 없는 ‘억압의 블랙홀’이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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