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씨의 묘소는 유언에 따라 꽃동네 성모상 앞에 마련돼 있다. 오 신부는 “6월 6일 기일이 되면 정 추기경이 묘소를 찾아 마치 살아계신 이에게 말하듯 ‘이런저런 중요한 일이 있는데 어머니가 기도해 달라’고 간곡하게 말하곤 한다”면서 “그 같은 효심이 정 추기경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4대째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다. 이 씨는 20세에 명동성당에서 당시 역관이었던 정 추기경의 아버지와 결혼했으며 22세 때 정 추기경을 임신했다. 이 씨는 주교의 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잘생긴 청년이 “어머니, 저 주교 됐어요” 하고 말하는 태몽을 꾼 뒤 ‘큰일을 할 아이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날마다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씨는 정 추기경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복사(服事·신부 옆에서 미사 진행을 돕는 소년)를 하도록 하면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키웠다. 오 신부는 “정 추기경이 계성보통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가 사준 연필과 공책을 늘 가난한 아이들에게 줘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정 추기경의 아버지가 역관으로 일본에 간 뒤 소식이 끊기자 이 씨는 홀로 외아들을 키웠다. 홀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사제가 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정 추기경은 6·25전쟁 때 생사가 엇갈리는 체험을 한 뒤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1961년 사제품을 받으면서 어머니의 품을 영영 떠났다.
유일한 혈육인 외아들이 사제가 되어 로마 서울 청주를 돌아다니는 동안 이 씨는 인천에서 혼자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돌봤고,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가톨릭 연령회원으로 일했다. 오 신부는 “정 추기경의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지언정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꿋꿋하게 사셨다”고 전했다.
정 추기경이 1970년 최연소 주교가 돼 서품식을 올릴 때 주교의 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정 추기경의 모습이 태몽과 너무 똑같아 이 씨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이 씨가 아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사적인 부탁은 주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사진 한 장만 달라는 것이었다. 이 씨는 세상을 뜰 때까지 이 사진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매일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씨는 사제 생활에 사사로운 가족의 일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평생 아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들 주교가 지금 기도를 할 거야” “아들 주교가 책 번역할 시간이야” 같은 말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곤 했다는 것.
여든이 넘은 뒤 당시 청주교구장이던 아들 곁에서 살 수 있게 된 이 씨는 1995년 6월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날, 오 신부에게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며 사후 안구 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 씨가 세상을 뜬 뒤 유언대로 안구 기증을 할 때 정 추기경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두 눈을 적출하는 수술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며 아들의 마지막 도리를 다했다.
정 추기경은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뒤 유산을 정리해 충북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에 땅을 사 성당을 건립했고 본당 이름을 ‘성녀 루시아’로 지었다. 루시아는 로마 시대 때 두 눈을 잃고 순교한 성녀이자 이 씨의 세례명이다. 평생 기도와 선행을 통해서라도 아들의 곁에 있고자 했던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 곁에 영원히 남게 됐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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