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르담 역 앞에서 노란색 잠바를 걸친 금발의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산업 디자이너인 리처드 휴튼(39) 씨다.
암스테르담에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오는 로맨틱 분위기의 열차에 몸을 싣고 1시간여 가니 현대적인 계획도시 로테르담이 나타났다.
초행길의 기자를 위해 승용차를 직접 몰고 역까지 마중을 나온 그의 모습을 보니 모르던 남자와 ‘첫 데이트’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 스위트(Oh, Sweet)!’
네덜란드 에인트호벤 디자인아카데미 출신으로, ‘드룩 디자인’의 초기 멤버인 그의 작품들은 첫 인상만큼이나 달콤하고 따뜻하다.
그가 만든 머그 컵인 ‘도무어(Domoor)’는 여느 컵과 달리 큼지막한 손잡이가 양쪽에 달려 있다. 두 아들을 둔 그는 ‘왜 컵은 하나의 손잡이만 있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컵에 두 개의 손잡이를 달고 나니 아이들이 컵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컵은 컵인 동시에 장난감도 됐다. 어른들도 재미있어 했다.
노랑 분홍 초록 등 밝고 따뜻한 컵 색상도 동심(童心)을 절로 일으켰다. 그가 입고 나온 잠바의 노랑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의자와 책상 등 가구를 비롯해 컵 조명 과일접시 재떨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런던 디자인 박물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작품은 엄숙하지 않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흥미로운 디자인의 의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일본 디자인회사인 ‘E&Y’의 의뢰를 받아 만든 그 의자는 사람의 엉덩이가 닿는 부분부터 의자 다리까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유를 물었다.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배우 샤론 스톤이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담배를 피우잖아요. 그 섹시한 자세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편안하고 깨끗하고 섹시한’ 주제를 의자에 표현하고 싶었죠.”
설명을 듣고 의자에 앉아보니 절로 다리가 벌어졌다. 마치 샤론 스톤이 된 것처럼 야릇한 느낌이 전해 왔다. 그 느낌에 매료된 듯 E&Y는 50개 한정 제작하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대량 생산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나는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하기 바랍니다. 디자인은 결코 디자이너의 ‘독백’이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는 ‘대화’입니다.”
간결과 명확함을 디자인 콘셉트로 내세우는 그는 여느 디자이너들처럼 종이 위에 스케치하며 아이디어를 구상하지 않는다.
“나는 일하지 않을 때 디자인합니다. 아이러니죠. 때로는 휴대전화도 받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죠. 비행기를 타거나 고속도로를 달리며 홀로 생각하는 시간에 대부분의 영감이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을 ‘문명화된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렀다. 아무도 그에게 무엇을 디자인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작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해석이나 의미를 강요할 생각이 없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디자인한 물건을 구입해 색상을 바꾼다면. 물론 ‘대환영’이다.
“의자는 결코 감상하기 위해 만들지 않습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박물관을 위해 디자인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만을 생각합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유명 건축회사인 MVRDV와 함께 최근 경기 고양시 한국국제전시장(KINTEX) 인근의 대형 복합쇼핑몰 건축과 아트 디렉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테크놀로지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디자인 영역을 가전 제품으로 옮길 생각이다.
한국 디자인을 향한 조언을 부탁하자 거침없이 “독창성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기업 경영자라면 경쟁 업체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좋은 디자인에 따르는 투자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소비자들은 좋은 디자인에 기꺼이 지갑을 열 것입니다.”
로테르담=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