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가슴을 항상 내놓고 다니는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같은 지역에서도 가슴에 대해 에로틱하다고 생각할까?
대부분의 서구 여성학자는 ‘가슴을 가리지 않는 문화권’에서는 가슴이 일반적으로 덜 주목을 받는다고 주장해 왔다. 소위 ‘문명국가’에서 가슴이 에로틱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여자들이 더는 직접 젖을 먹이지 않기 때문에 가슴이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성적인 기능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족 사회에서도 부인이나 처녀의 드러난 가슴을 뻔뻔스럽게 쳐다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독일의 문화사학자이며 민속학자인 저자는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논리적 기반으로 원용됐던 노르베르트 엘리아스(1897∼1990)의 저서 ‘문명화 과정’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엘리아스 학파의 이론은 서구에서 중세 이후 인간이 수치에 대한 자각과 본능의 통제를 통해 문명화 과정을 이뤄냈다는 것. 그렇다면 문명을 이룬 근대 서구 사회는 신체에 대한 동물적 본능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 중세 이전 세계나 소위 ‘비문명국가’에서는 수치심도 없이 본능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살아갔다는 것인가?
저자는 15년에 걸친 자료 수집과 연구 끝에 식민주의자들의 ‘문명’ 이론이 갖는 허실을 낱낱이 들추어낸다. 엘리아스가 문명의 탄생기라고 했던 중세에도 여성들의 상반신 노출은 빈번했다. 16세기 말 영국의 처녀 왕 엘리자베스 1세도 가슴을 열어젖힌 과감한 데콜테(가슴이 파인 예복)를 입었고 귀족 부인들의 데콜테는 너무 깊이 파여 배꼽까지 드러날 정도였다.
아프리카 카메룬의 야운데족 출신인 한 남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럽인은 언제나 우리를 야만인이나 원시인이라고 불렀소. 그러나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네카어 강가에서 겨우 주요 부분만 가리고 다리를 벌린 채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젊은 여자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는 수치심으로 차라리 죽고 싶었소.”
이 책은 동서양 문명을 초월해 에로티시즘의 상징물처럼 여겨졌던 가슴에 대한 문화사적 보고서다. 코르셋과 브래지어의 역사, 데콜테의 변천, 토플리스 패션, 젖을 먹이는 엄마의 가슴과 에로티시즘의 관계, 충전재를 넣은 브래지어의 유행 등 은밀하게 노출되고 감춰져 왔던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풍만한 가슴’에 대한 열광은 언제부터였을까? 저자는 이것이 1950, 60년대 미국에서 생겨난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큰 가슴은 여성이 임신을 했거나 젖을 먹이고 있다는 표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덜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래서 유럽에서도 여성들은 코르셋이나 가슴 밴드 등으로 가슴을 납작하게 만드는 데 더 큰 관심을 쏟아왔다고 한다. 원제 ‘Der Erotische Leib’(1997년).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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