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투 헤븐’으로 등장한 조성모가 ‘얼굴 없는 가수의 원조’라고들 하지만, 아니다. 이미 1934년 ‘마의 태자’로 데뷔한 얼굴 없는 가수 ‘미스 코리아’가 있었다. 그 당시 음반사는 ‘미스 코리아’를 “금강산에 숨어 있다 레코드계에 봉화를 들고 나온 천사”라고 선전하며 신비주의 마케팅을 펼쳤다.
대학 국문학 강사로 대중가요사를 연구해온 장유정(34·사진) 씨가 최근 펴낸 ‘오빠는 풍각쟁이야’(민음in)는 이처럼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풍경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복원해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톱스타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최초의 기생 출신 가수로 1930년대 중반에 활동한 왕수복은 인기투표에서 계속 1위를 차지했고 한 달에 수백 장의 팬레터를 받았다. 평양에서 낮 공연을 하고 비행기로 경성에 와 저녁공연을 하는 가수도 있었다고 당시 신문 기사는 전한다.
잡지 ‘삼천리’는 1934년 “거리의 꾀꼬리요, 거리의 꽃으로 이 땅을 즐겁게 꾸미는 민중음악가-그는 레코드계 가수입니다. ‘조선의 보배’를 찾아냅시다”라고 광고하며 최고 인기가수를 투표로 뽑았다.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어릴 적부터 가수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장 씨가 “대중가요에 바치는 첫 번째 연서(戀書)”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한 라디오 방송이 주최한 가요제에서 대상을 타고 몇몇 기획사에서 음반을 내자는 연락도 받았지만 대학가요제로 데뷔하겠다고 미뤄뒀다. 노래 가사를 잘 쓰고 싶어 국문과에 갔고 판소리, 피아노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웠으나 1993년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그만 떨어지고 만다.
![]() |
“절망했어요. 노래를 직접 부를 수 없다면 노래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1995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이번 책의 주제를 착상했으니 첫 연서를 쓰는 데 1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가사에 ‘월급쟁이’가 자주 나오면 당시 회사원의 사회적 지위를 조사하는 등 퍼즐 맞추기를 하듯 유성기 음반 가사지, 신문, 잡지를 꼼꼼히 분석해 대중가요를 둘러싼 근대의 풍경을 복원했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2004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학위 논문이 이번 책의 모태가 되었다.
‘SS501’, 보아, 비를 좋아하고 낮에 혼자 노래방에 가서 거미의 ‘그대 돌아오면’을 비롯한 애창곡들을 부르는 게 취미인 장 씨는 아직도 가수의 꿈을 접지 못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노래를 하고 싶다는 열병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요. 작곡을 배워 자비로라도 음반을 만들어 볼 겁니다. 그래야 죽을 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