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日전위서예가 이노우에 생환

  • 입력 2006년 3월 11일 03시 09분


미국 공군 B-29 폭격기의 일본 열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있은 다음 날인 1945년 3월 11일 새벽.

한 청년이 도쿄(東京) 요코가와 초등학교 운동장의 시체 더미 속에서 신음하며 의식을 되찾았다. 서예를 공부하던 청년의 이름은 이노우에 유이치(井上有一·1916∼1985).

이후 그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숨진 대가로 가까스로 자유를 얻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전통과 단절한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서예를 시도했다.

그는 1957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서예 작가로는 처음 출품한 뒤 미국 뉴욕과 독일 등에서 잇단 전시회를 열며 주목을 받았다. 일본 평론가 우나가미는 “절규의 느낌을 서예로 표현했다”고 평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여러 글자나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대형 글자 하나만을 써서 전시하는 것이었다.

특히 ‘가난할 빈(貧)’자를 30년간 썼는데, 그건 고물상집 아들로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에 꺾이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는 또 ‘질박하고 과장되지 않게,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을 ‘빈’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통적 재료와 도구도 과감히 던져버렸다. 먹물은 수성 본드와 탄소가루를 섞은 것을 썼는데 심지어 먹물이 종이에 흘러내린 것까지 모두 작품으로 간주했다. 말 털로 된 큰 붓과 글씨에 맞는 큰 장지도 만들었고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쓰고, 쓰는 순서를 뒤집기도 했다.

그는 “눈을 감고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순식간에 쓴 작품은 마치 추락한 시체와도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달라야 한다는 의지와 더 나은 것을 써야 한다는 갈등 사이에서 당장 옥상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심정으로 마구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먹을 만들고, 밤에 글을 썼다. 낮에 다른 일을 한 것은 글 쓰는 일에 좀 더 솔직해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76년 8월 31일 소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단에서 내려온 그는 암으로 5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 때도 오로지 쓰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는 서예라는 것이 본래 붓 외의 다른 것으로 쓰여졌음을 상기시키며 연필이나 크레용의 일종인 콘테로 생의 마지막까지 작업을 했다.

“글씨를 쓰는 것은 즐겁지 않으며 즐기지도 않는다. 괴로울 뿐이다”라고 말하며….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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