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양자역학의 가장 혁명적인 측면은 관찰의 결과가 관찰자의 의식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게 아닐까. 어떤 관찰실험을 하느냐 하는 과학자의 의사에 따라 물질은 그 반응을 달리했으니 과학자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자연 현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측정은 전자(電子)의 상태를 변화시키며, 우주는 그 다음 결코 동일하지 않다!”(존 휠러)
전자는 과학자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객관적 성질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과 물질, 관찰자와 피(被)관찰자 간의 예리한 데카르트적 분리는 더 유지될 수 없었다.
현대물리학은 의식과 물질의 이원론을 초극하면서 자연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라는 고전물리학의 이상을 무효화했다. “지식의 흐름이 비(非)기계론적 실재를 향하고 있다. 우주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거대한 사상처럼 되어 가기 시작하였다.”(데이비드 봄)
제프리 추의 ‘구두끈(boot strap) 가설’은 아예 물리학 이론을 불교나 힌두교의 통찰로 이끈다. “모든 입자의 특성이 관찰 방법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은 물질세계의 기본 구조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찰된 물질 모형은 마음의 모형의 반영인 것이다.”
양자역학의 이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서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에 주목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였다. 그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범양사·1979년)에서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사이에 발견되는 심오한 유사성을 이렇게 전한다.
“원자물리학이 발견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들은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불교나 힌두 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옛 지혜의 예증이자 장려이며 그것을 더욱더 갈고 닦는 것이다.”(오펜하이머)
“원자세계의 이 거대한 드라마에서 관객이면서 동시에 연기자로서 우리 입장을 조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혔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을까.”(보어)
그렇다면 앙코르 와트나 교토의 불교 승려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옥스퍼드와 버클리의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현대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현된 정밀과학과, 주로 명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언어로 전달될 수 없다고 하는 직관(直觀)이 어떻게 수렴된단 말인가?
1970년대 ‘신과학운동’의 선봉에 섰던 카프라와 켄 윌버는 이 점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윌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한언·2006년)에서 현대물리학이 결코 신비적 세계관을 지지하거나 증명하지 않으며, 그것은 ‘개의 꼬리’(동굴 안 그림자)로 ‘개’(동굴 밖 빛)를 증명하려는 것과 같다고 잘랐다. “현대물리학의 선구자들은 그들이 물리학자였기 때문에 신비주의자였던 게 아니라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자였다!”
슈뢰딩거와 같은 과학자도 종교의 진정한 영역은 과학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선을 그었다.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은 물리학과 종교의 강제 결혼에 의한 물리학의 왜곡도 원하지 않았고, 신비주의를 값싸게 팔아 버릴 생각도 없었다고 윌버는 강조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훗날 미래의 물리학에 의해 다른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깨달음은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붓다가 아닌 것이다!”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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