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둘러봐도 거칠 것 없는 망망한 대지에 드러누워 잠에 빠진 사내(‘거인의 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다 머리가 거꾸로 처박혀 죽은 소(‘하늘에서 땅으로’), 광활한 대평원에서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말 달리는 사람들(‘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새끼 양을 껴안고 미소 짓는 발그레한 뺨을 가진 아이들(‘천국의 아이들’).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산방화랑에 들어서면 1층부터 3층까지 벽마다 대담한 구도에 호방한 붓질이 돋보이는 대작들이 걸려 있다. 수묵화가로 독보적 기량을 인정받고 있는 김호석(49) 씨의 신작들이다. 몽골, 고비사막, 티베트, 카자흐스탄 등 유라시아 초원과 사막에 빠져 지낸 그의 시간이 ‘문명에 활을 겨누다’라는 제목의 전시회(15∼28일)와 문학동네 화집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그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수묵운동을 펼치며 아파트 등 도시풍경을 그려 주목받았고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다. 인물화에 특장을 지닌 그는 한지 뒤쪽에 수십 번 덧칠을 해 물감이 은은히 배어나게 하는 배채(背彩) 기법을 사용해 손으로 만지고 싶은, 살구빛 피부색을 살려낸다.
유라시아 풍경과 풍물을 수묵으로 그려낸 그의 신작들은 인간과 사회, 가족의 일상사를 다룬 예전의 그림들과 사뭇 다르다. 생성과 소멸, 인간과 자연의 근원이란 소재의 변화가 눈에 띈다. 또 넓은 화폭 안에 주위의 풍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대상을 바짝 끌어당겨 그린 작품에선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 적막한 대자연, 그 안에서 일렁이는 바람의 숨결, 하나의 고리를 이루며 순환하는 삶과 죽음이 어우러진 화폭은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황량한 사막 안에서 꿈틀거리는 왕성한 생명력은 작가에게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었다. 그는 “몽골의 설원은 바람이 너무 세서 식물도 자라기 힘든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죽은 소가 있던 자리에 가보니 패랭이꽃이 피어 있었다”며 “죽음은 적멸이 아니라 생성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02-733-5877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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