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남’일까?
우리 음식과 와인의 ‘궁합’은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갖는 궁금증이다. 최근 국내 한 연구팀은 분자 연구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도 심장병이나 암 발병률이 낮은,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를 규명했다. 레드 와인에 들어 있는 항산화(抗酸化) 물질 레스베라트롤이 심장병 등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
삼성경제연구소가 주관하는 동호회 ‘와인포럼’의 안성환(26·경희대 조리과학과 4년) 씨는 3개월 전 ‘삼겹살 번개’에서 맛 본 프랑스 보르도 산 ‘샤토 르쿠뉴’(레드)를 잊지 못한다.
“삼겹살이 ‘티냐넬로’(레드)보다 샤토 르쿠뉴와 ‘찰떡궁합’이었습니다. 2만 원짜리 샤토 르쿠뉴가 20만 원 이상의 티냐넬로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생산되는 티냐넬로는 2004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추석 선물로 그룹 임원들에게 선물했다는 기사가 보도된 뒤 다음 날 시장에서 동이 난 와인이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 그렇다. 가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궁합의 신비한 느낌을 섹스보다 유혹적이라고 말했다.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벗기듯 달라지는 그 오묘한 세계를 와인전문지 ‘월간 와인리뷰’와 함께 살펴본다. 》
○ 우리 식탁에 부는 와인바람
12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식객’. 이곳은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 동아일보에서 만화로 소개한 ‘홍어’ ‘과메기’ ‘간고등어’ 등을 맛볼 수 있다. ‘백산찾사(100대 명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1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코끝이 찡하도록 삭힌 홍어, 삶은 돼지고기, ‘묵은지’(김치) 등 삼합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방 ‘뱅 드 페이 애로 귀엠’(레드)이 주인공이다.
“어, 알싸한 홍어하고도 괜찮게 어울리네.”
“아냐. 칼칼한 막걸리보다 못해.”
궁합에 대한 촌평이 이어진다. 하지만 ‘와인 선생님’ 이효정(중앙대 산업교육원 와인 전문과정 강사) 씨의 평가는 냉정하다.
“레바논산 ‘샤토 무사르’(레드)가 좋은데…. 홍어는 톡 쏘는 향이 강해 와인과 어울리기 쉬운 음식이 아닙니다. 샤토 무사르는 질감이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산도(酸度)는 강한 편입니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먼지도 폴폴 풍기는, 꼭 오래된 헌책방 맛이죠. 홍어랑 딱 어울리는데….”
와인은 우리 식탁 가까이에 성큼 들어와 있다.
고깃집에서 와인을 보는 것은 낯익은 풍경이 됐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화로가인’ 강남점의 경우 한주에 와인이 15병 이상 판매된다. 지배인 김경수 씨는 “쇠고기에는 칠레산 ‘몬테스 알파’(레드), 저가용 삼겹살에는 2만 원 미만의 하우스 와인을 주로 찾는다”고 말했다.
광고기획사 ‘바롬웍스’ 주명진 기획실장(34)은 최근 냉장고를 뒤지다 뜻밖의 맛을 경험했다. 해물 떡볶이와 프랑스산 ‘소비뇽 블랑’(화이트)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주 씨는 “차가운 소비뇽 블랑이 떡볶이의 맵고 진한 맛을 중화시키면서 입 안을 개운하게 했다”고 말했다. 매콤달콤한 고추장 소스 때문에 레드 와인을 찾기 쉽지만 이 조합은 둘의 맛을 느끼기 어렵고 해물의 비릿함이 더욱 강해진다.
싸이월드 와인동호회 ‘와인과 예술적인 삶’ 회원 김한천(34·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차장도 우리 음식과의 모험에 곧잘 나선다.
“고기를 넣은 전은 씹히는 맛이 있어 이탈리아산 레드 와인과 잘 맞습니다. 오리고기는 기름기가 없고 담백한 편인데 여러 와인을 시도했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 궁합의 법칙
음식은 와인의 맛에 영향을 주고, 와인은 음식의 맛을 좌우하기도 한다.
영국의 전설적인 와인 품평가 오즈 클라크는 지나치게 짜거나 매운 것, 야채, 식초가 많이 들어가거나 국물이 많은 음식은 와인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고 했다. 한국 음식에 그런 게 많다.
와인리뷰 김미경 교육팀장(소믈리에)은 “한국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니다”며 “식재료와 요리 방법, 향신료를 염두에 두면 의외로 ‘보석’ 같은 궁합을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리 음식과 와인 ‘짝짓기’의 첫 번째 원칙은 ‘같은 성질의 결합’이다. 음식과 통상적으로 보디(Body)라고 부르는 와인의 무게감을 맞춰야 한다.
센 것은 센 것으로, 넉넉한 것은 넉넉한 것으로, 농도가 짙은 것은 짙은 와인으로 매치하는 게 좋다.
두 번째는 ‘압도의 원칙’이다. 음식이 단 경우 더 진하고 감미가 강한 와인으로 짝을 짓는다. 산(酸)은 산으로, 단맛은 단맛으로 다스리는 것. 김 팀장은 “단맛을 중화시킨다고 시큼하거나 다른 맛의 와인을 선택하면 음식과 와인의 단점만 드러난다”며 “음식보다 단 와인을 결합해야 덜 달게 느껴지면서 양쪽 고유의 풍미가 살아난다”고 말했다.
○ 새로운 궁합을 찾아서
고기류와 자극적인 음식은 레드, 생선은 화이트 와인이라는 조화도 일반적인 이야기다. 식재료도 중요하지만 조리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닭이라고 해도 통닭 찜 백숙 등에 따라 맞는 와인이 다르다.
심하게 매운 음식이 아닐 경우 ‘스위트 로제’ ‘화이트 스파클링’ ‘샴페인’류가 좋다. 우리 음식에 무난하게 어울리는 편이다.
단백질이 풍부한 장어 소금구이는 ‘깊고 짙은 근육질’의 레드 와인이 좋다. 와인 궁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색(色)’이다. 장어구이와 잘 어울리는 우리 전통주가 복분자라는 것은 와인뿐 아니라 술과 음식 일반의 상식을 보여 준다.
고기류는 기본적으로 레드 와인이 맞지만 다른 응용 방식이 가능하다.
맵고 짠 경우에는 쉬라 품종의 와인을, 로스구이에는 피노 누아 쪽이 좋다. ‘흰 살’ 육류로 분류되는 송아지(실제는 옅은 핑크 색), 돼지고기, 닭고기는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린다.
기름기가 많은 곱창의 경우 호주산 ‘스파클링 쉬라즈’(레드 스파클링)나 칠레산 ‘얄리 그랑 리저브 카르메네르’(레드)가 좋다. 와인의 타닌 성분이 느끼함을 상쇄시키면서 곱창 특유의 고소함을 그대로 살려준다.
전통 음식은 아니지만 대중화된 자장면에도 어울리는 와인이 있다. 이탈리아산 ‘레오나르도 키안티’와 ‘조닌 키안티 클라시코’(이상 레드). 밝고 선명한 색감, 절제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은근하게 떫은맛과 ‘발랄한 산도’가 입안을 개운하게 한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생전에 식품평론가를 자처했다. 304번째, 마지막 글이 그가 죽은 뒤 출간된 ‘요리 대사전’이다. 꼭 그 정도는 아니라도 냉장고를 뒤져 새로운 맛에 도전해 보자.
◇ ‘월간 와인리뷰’가 추천하는 우리 음식과 와인 | ||
음식 | 와인(타입)과 가격 | 추천 이유 |
비빔밥 | ‘켄우드 화이트 진펀델’(미국산 로제) 3만 원‘얄리 피노 누아’(칠레산 레드) 4만 원 | 여러 식재료가 어우러지기 때문에 복합미가 풍부한 레드 와인이나 매운맛을 덜어 주는 향기로운 로제가 좋다. |
잡채 | ‘볼랭제 스페셜 퀴베 브뤼’(프랑스산 샴페인) 10만5000원‘페라리 브뤼’(이탈리아산 화이트 스파클링) 4만6000원 | 잡채는 양념이 강하지 않지만 기름기가 많은 편. 깔끔한 맛의 화이트 스파클링이나 샴페인류가 어울린다. |
자장면 | ‘레오나르도 키안티’(이탈리아산 레드) 2만3000원‘조닌 키안티 클라시코’(〃) 3만2000원 | 밝고 선명한 색감과 절제된 향을 지닌 와인이 좋다. 은근하게 떫은맛과 발랄한 산도가 입 안을 개운하게 한다. |
떡볶이 | ‘테일러 셀렉트 포트’(포르투갈산 레드) 2만9000원‘발렌틴 비안치 뉴 에이지 로제’(아르헨티나 산 로제) 1만3000원 | 매콤한 떡볶이와 테일러 포트와인의 매치는 도전적인 와인 애호가를 위한 것. 로제 와인의 청량감과 신선함도 떡볶이의 자극적인 맛을 살려 준다 |
빈대떡 | ‘휘겔 게뷔르츠트라미너’(프랑스산 화이트) 3만9000원‘파펜하임 게뷔르츠트라미너’(〃) 4만 원 | 과일향이 강한 프랑스 알자스산 게뷔르츠트라미너가 제격이다. 시원하게 보관해 마시면 빈대떡의 기름기도 커버할 수 있다. |
파전 | ‘빌라 마리아 리저브 샤르도네’(뉴질랜드산 화이트) 6만7000원‘실레니 에스테이트’(〃) 3만3000원 | 뉴질랜드 화이트는 구 대륙 와인 못지않은 복합미와 균형감을 갖추고 있다. 화이트의 상큼함이 파전의 기름기와 입 안에 오래 남는 파 냄새를 씻어 준다. |
튀김 | ‘마시 소아베’(이탈리아산 화이트) 4만2000원‘알레그리니 소아베’(〃) 2만6000원 | 화이트 와인의 신맛은 각종 튀김류의 기름기를 씻어 준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화이트 와인의 명산지 베네토 지방의 와인은 상큼하면서도 소박하다. |
떡갈비 | ‘샤토 드 페즈’(프랑스산 레드) 11만 원‘샤토 라 루비에르 레드’(〃) 11만8000원 | 떡갈비는 양념이 진하다. 강렬하고 육감적인 맛의 프랑스산 보르도 와인이 제격. |
삼계탕 | ‘아이리 빈야드 피노 그리’(미국 산 화이트) 3만5000원‘폴 로저 브뤼’(프랑스산 샴페인) 10만 원 | 담백한 삼계탕에는 부드러운 질감의 미국산 화이트와 품격 있는 프랑스산 샴페인이 어울린다. |
닭도리탕 | ‘이기갈 샤토뇌프뒤파프’(프랑스 산 레드) 11만4000원‘르 뷰 텔레그라프’(〃) 16만 원 | 매운 육류와 가금류 요리에는 프랑스 남부 론 지방의 샤토뇌프뒤파프에서 나는 쌉쌀한 레드 와인이 좋다. |
족발 | ‘틴테라 샤르도네’(호주산 화이트) 4만3000원‘린드만 리저브 샤르도네’(〃) 3만9000원 | 모든 육류가 레드 와인과 궁합이 맞는 것은 아니다. 새우젓에 찍어 먹는 족발에는 타닌 성분이 강한 레드보다 입 안을 개운하게 하는 호주산 화이트가 어울린다. |
쇠고기수육,편육 | ‘빌라 안티노리 로소’(이탈리아산 레드) 4만1000원‘콜 도르시아 키안티’(〃) 4만6000원 | 담백한 편육은 부드러운 힘을 지닌 레드 와인이 좋다. 적절하게 떫은맛과 알맞은 산도, 생기 넘치는 과일 향이 조화를 이루는 이탈리아산 레드와의 궁합은 적격. |
머리고기 | ‘폭스크릭 리저브 메를로’(호주산 레드) 7만4000원‘피에르 스파 게뷔르츠트라미너 리저브’(프랑스산 화이트) 4만9000원 | 젓국을 곁들인 돼지 머리고기에는 부드러운 메를로 레드, 열대과일과 장미 향이 두드러진 게뷔르츠트라미너 화이트 와인이 좋다. |
보쌈 | ‘빌라 욜란다 모스카토 다스티’(이탈리아산 화이트 스파클링) 2만2000원‘이오스 모스카토’(미국산 화이트 스파클링) 4만 원 | 맵고 자극적인 김치와 돼지고기의 기름기를 조화시키려면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이 알맞다. |
제육볶음 | ‘1865 리제르바 카르메네르’(칠레 산 레드) 5만 원‘에쿠스 카르메네르 리저브’(〃) 3만3000원 | 진한 농축미와 고추향도 느껴지는 매콤한 칠레산 카르메네르 레드는 제육볶음과 함께 마시기에 손색이 없다. |
곱창구이 | ‘블루밸리 스파클링 쉬라즈’(호주 산 레드 스파클링) 2만9000원‘얄리 그랑 리저브 카르메네르’(칠레산 레드) 4만 원 | 상큼하고 너무 달지 않은 호주산 레드 스파클링 |
불고기 | ‘루더포드힐 메를로 나파밸리’(미국산 레드) 5만8000원‘칼베 에이토스’(프랑스산 레드) 10만 원 | 달면서도 짭짤한 맛을 내는 불고기 양념에는 적당한 산도와 달콤한 과일 향을 가진 레드가 좋다. 대표적인 것이 메를로 품종의 레드와인. |
갈비구이 | ‘피치니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이탈리아산 레드) 3만6000원‘폰타나프레다 바르바레스코’(〃) 8만5000원 | 양념을 살짝 가미한 갈비구이에는 육류의 질감을 받쳐 줄 수 있는 레드가 좋다. 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산미를 잃지 않고 강렬한 향이 있는 바르바레스코와 잘 어울린다. |
찹쌀순대 | ‘산마르틴 템프라니요’(스페인산 레드) 2만 원‘마르케스 데 리스칼 리제르바’(〃) 4만8000원 | 스페인은 돼지고기 요리와 건조한 햄(하몬)으로 유명하다. 비슷하게 순대는 스페인의 대표 선수격인 템프라니요 레드와 궁합이 맞는다. |
육회 | ‘몬테스 알파 카베르네 소비뇽’(칠레산 레드) 3만8000원‘카르멘 나티바 카베르네 소비뇽’(〃) 7만5000원 | 칠레 등 신대륙에서 레드 와인의 ‘제왕’으로 알려진 카베르네 소비뇽은 떫은맛이 덜하고 유순하다. 살짝 양념을 가미한 육회와도 어울린다. |
장어소금구이 | ‘바르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이탈리아산 레드) 9만 원‘카스텔로 반피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13만7000원 |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레드 와인은 강한 맛과 실크처럼 부드러운 맛의 조화로 유명한 명주. 장어의 기름진 질감과 잘 어울린다. |
낚지 볶음·전골 | ‘로버트 몬다비 우드브리지 화이트 진펀델’(미국산 로제) 1만6000원‘베린저 화이트 진펀델’(〃) 1만8000원 | 묵직한 레드 와인이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보다는 약간의 당도가 느껴지는 미국산 로제 와인이 제격이다. |
골뱅이무침 | ‘위스덤 크림 셰리’(포르투갈산 레드) 2만5000원‘파라도르 포트 타우니’(포르투갈산 화이트) 2만3000원 | 식초가 들어간 요리에는 알코올 도수와 당도가 높은 포트 와인을 선택하는 게 낫다. |
굴 | ‘샤블리 1등급 몽맹 윌리암 페브르’(프랑스산 화이트) 6만6000원‘장 마크 브로카 샤블리’(〃) 4만 원 | 굴과 와인의 궁합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샤블리 마을에서 생산되는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은 세련되고 깔끔하고 신선하다. |
아구찜, 해물찜 | ‘이오스 진펀델’(미국산 레드) 4만7000원‘아니스톤 베이 로제’(남아프리카공화국산 로제) 10만9000원 | 매운 양념과 콩나물을 곁들인 해물 요리에는 농도 짙은 와인보다 우아한 풍미를 지닌 진펀델이나 매운맛을 덜어주는 드라이한 스타일의 로제 와인이 좋다. |
도미 | ‘샹송 푸이 휘세’(프랑스산 화이트) 6만7000원‘뫼르소 부샤 페레 피스’(〃) 9만3000원 | 단맛이 거의 없고 깔끔한 프랑스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은 가벼운 양념에서 매운 소스까지 다양한 생선 찜 요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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