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가 막 지나가고 난 뒤에 나는 그녀의 집 담장 밖에 있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큼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생명들이 막 살아서 꼬물대며 자라는 게 보일 것 같은 명징한 오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나만 허송세월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은 것이로되 그녀를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젊은 사랑의 시절에 느껴지는 시간은 억겁과 같은 것, 아직 물기를 머금은 풀잎들의 잎만이 속절없이 고울 뿐이었다.
바로 그때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꽃 한 무더기가 꽃분수를 이루며 솟아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받침목을 타고 올라간 그 꽃은 사방을 향해 의연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었다. 주황색의 콧대 높은 꽃, 마치 내가 기다리는 여인과 같았다. 나는 그 꽃이 무엇으로 불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망막이 가득하고 아득할 뿐. 늠연하면서도 광휘로운 그 꽃들에 비하면 나는 하찮은 지푸라기였다.
그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났다. 그 여인의 아름다움도 ‘보는 눈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두 사라졌고 그 풍경도 사라졌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
그렇지만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모른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꽃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그냥 살았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난 뒤 이상한 책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란 책. 1990년의 일이다.
그 책을 보았을 때 우선 첫 소감은 야릇했다. 책의 부제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이라는 말이 주는 약간의 고약스러움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의당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그냥 살고 있는 모습에 대한 질타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불쾌감이었다.
이 책은 우리 산하의 사계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꽃들을 계절에 따라 화보로 보여 주고 그 꽃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100여 종의 꽃의 정식 이름과 속명을 소개하는가 하면 그 꽃에 얽힌 설화나 사연들도 있었고 그 꽃들의 쓰임새도 적혀 있었다. 덕분에 나의 의식 저편에 숨어 있었던 꽃의 이름도 부를 수 있었다. ‘능소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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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청춘의 시절 이후 내 마음에 광휘로운 광경으로 남아 있던 풍경에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마음의 저편에 그냥 복합적인 풍경으로 혼몽스럽게 존재하던 풍경은 마침내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될 수 있었다.
강형철 시인·숭의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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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 산책의 숲,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순우) | 곤충의 사생활 엿보기(김정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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