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강의’는 다석이 1927년부터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서울 YMCA에서 무려 35년간(1928∼63년) 펼친 연경반(硏經班·경전연구반) 강의 중 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의 약 1년치 내용을 속기한 것이다. 다석은 자신이 쓴 다석일지를 제외하고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해 제자들이 부랴부랴 속기록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1년 치 강의 속기록은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육성기록으로 꼽힌다. 다석은 무엇보다 기독교 사상을 우리 것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사상가였다. 하느님-예수의 관계를 유교적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완성으로 해석했고, 도덕경의 도(道)자를 하느님이 계시는 저 높은 곳으로 머리(首)를 향하여 달려가는(走) 것을 나타낸 것으로 새겼다.
다석은 또한 한글은 하느님이 세종대왕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보낸 계시라며 우리말 단어 하나하나를 새롭게 새겼다. 그는 하느님을 우리말로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분이라는 뜻에서 ‘없이 계신 분’이라고 풀었고 ‘오늘’은 하루가 늘, 곧 영원이라는 의미에서 ‘오! 늘’로 새겼다. 훗날 함석헌의 대표적 사상으로 알려진 씨ㅱ(백성) 사상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사상도 그 원류는 다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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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에는 1955년 12월 14일 함석헌이 태어난 지 2만 일 되던 날 밤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함석헌은 이날 스승인 다석과 만둣국을 나눠 먹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그래프로 그려 설명했다. 포물선 형태로 완만히 상승해 간 그 그래프는 다석을 만난 1921년과 우치무라를 만난 1924년에는 수직 상승이 이뤄졌다.
저자인 김용준 교수의 성장과정에도 그런 수직 상승이 있었다. 1949년 서울 YMCA에서 우연히 함석헌의 강연을 들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런 김 교수가 그려낸 함석헌의 모습은 시 아닌 시라도 읊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이며, 이승만의 반공독재와 박정희의 군부독재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면서도 외국에서는 결코 한국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담지 않는 진정한 애국자이며, 무엇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평생 실천한 ‘기다림의 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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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수고함과 기다림을 배우라.’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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