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내 운명… 전문번역가 6人, 이야기 담은 책 펴내

  • 입력 2006년 3월 23일 03시 04분


번역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번역의 기쁨과 고통을 토로한 책 ‘번역은 내 운명’을 함께 펴낸 베테랑 번역가 이종인, 김춘미, 권남희, 최정수 씨(왼쪽부터)가 20일 서울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다. 공동저자 가운데 강주헌, 송병선 씨는 서울에 없어 참석하지 못했다. 박경모 기자
번역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번역의 기쁨과 고통을 토로한 책 ‘번역은 내 운명’을 함께 펴낸 베테랑 번역가 이종인, 김춘미, 권남희, 최정수 씨(왼쪽부터)가 20일 서울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다. 공동저자 가운데 강주헌, 송병선 씨는 서울에 없어 참석하지 못했다. 박경모 기자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출처인 성경에는 ‘낙타’가 없다. 우리가 계속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고 알고 있는 까닭은 번역가가 ‘밧줄(gamta)’을 ‘낙타(gamla)’로 혼동했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다른 문화의 전달자다. 우리가 읽는 것의 약 4분의 3은 번역물. 번역가가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얻는 앎의 내용은 ‘낙타’와 ‘밧줄’의 차이만큼이나 크게 달라진다.

역할에 비해 늘 원저자 이름 뒤에 따라붙는 처지를 면치 못했던 번역가들이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전문번역가들이 모여 번역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 상상)을 펴낸 것.

책에 참여한 번역가는 촘스키 저술의 대표적 번역가인 강주헌,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 김춘미,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문 번역가 이종인, 무라카미 류(村上龍)와 아사다 지로(淺田次郎) 등 현대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인 권남희, ‘콜레라시대의 사랑’ 등 중남미 문학을 번역해 온 송병선, ‘연금술사’ 등 파울로 코엘료 작품을 주로 번역해 온 최정수 씨 등 6명.

모두 번역을 해온 지 8∼25년이 됐고 그간 번역한 책이 20∼130여 권에 이르는 직업 번역가들이다.

권 씨는 “아직도 번역을 부업으로 보는 측면이 강한데 번역가라는 직업 자체의 프로페셔널한 면을 보여주고 싶어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베테랑 번역가들이지만 이들은 매일 ‘오역’의 지뢰를 밟을까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최 씨가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번역할 때의 일이다. 부랑자 무리가 ‘berger(목동이란 뜻의 프랑스어)’를 동반한다는 표현이 계속 나와 부랑자 무리 중 목동 출신이 있나 보다 생각하며 번역했다. 그런데 한참 후 ‘berger가 난로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는 문장과 마주쳤고 그때서야 ‘berger’가 양치기 개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마터면 개를 사람으로 둔갑시킬 뻔 했던 것.

의역과 직역의 문제도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 이 씨는 “직역은 정숙하지만 예쁘지는 못한 여자와 같고 의역은 잘생겼으되 바람기 많은 남자와 같다”고 설명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의 번역가가 눈을 번역하기 곤란하듯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는 늘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불가피하게 의역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컨대 ‘수작을 걸다’는 뜻의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면 젊은 독자 중에선 ‘시비를 걸다’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는 ‘작업을 걸다’로 의역을 해야 이해하기 쉬워지죠.”

베테랑 번역가들이 받는 번역료도 원고지 장당 4000원 가량에 불과하다. 돈을 생각하면 직업 번역가를 하기 어렵지만 이들에겐 은밀한 기쁨이 있다. 송 씨는 “번역은 고독한 작업이지만 종종 원문과 그 인물들이 밤에도 나를 부르는 것을 느낀다”고 ‘은밀한 기쁨’을 설명했다.

외국어 못지않게 우리말을 잘 다루는 능력은 번역가의 필수조건. 좋은 문장을 갈고닦기 위해 강 씨와 최 씨는 신문을 꼼꼼히 읽고 권 씨는 한 작품 번역을 마칠 때마다 반드시 국내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김 씨는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중고교 시절 비틀스에 푹 빠져 살았던 경험이 하루키나 류를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경험을 많이 쌓고 번역 대상 언어를 쓰는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많아야 제대로 된 번역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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