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776m의 후지산과 전통극 가부키(歌舞伎)를 공연하는 극장이 그곳이다. 후지산은 단조롭기 짝이 없는 등산로가 이어지고, 가부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어조로 내뱉는 배우의 대사를 오랜 시간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여자가 설 수 없는 자리도 두 곳 있다. 전통씨름인 스모 경기가 열리는 모래판 위와 가부키 무대다. 봉건 시대의 전통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부키에 대해 이 같은 인상을 지닌 일본인들이 요즘 가부키극장 앞을 지날 때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표를 사거나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20, 30대이기 때문이다.
● 현대와 호흡하는 가부키
가부키가 전통에만 갇혀 있었다면 젊은 세대로부터 외면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부키는 최근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하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관객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7월 도쿄 긴자의 가부키자에서 공연된 ‘니나가와 십이야(十二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작품은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십이야’를 가부키로 만든 것이다. 쌍둥이 남매 세바스천과 바이올라가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헤어진 뒤 엉뚱한 사랑 소동에 휘말리는 원작의 무대를 일본으로 옮겨오고 연극 대신 가부키로 리메이크했다. 이 작품은 전통문화보다 서양문화에 익숙한 젊은 층의 큰 호평을 얻었다.
가부키에 현대극이나 현대음악적 요소를 융합시킨 장르도 크게 성공하고 있다. 3월 초부터 도쿄 시부야에서 공연되고 있는 ‘결투! 다카다바바(高田馬場)’는 예매 첫날인 1월 22일 하루 만에 2만 석이 모두 매진됐을 정도다.
오페라와 중국의 경극을 가부키와 융합시킨 ‘슈퍼가부키’ 장르도 인기 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슈퍼가부키 중 ‘신삼국지’ 3부작은 편당 제작비 수억 엔을 쏟아 부은 화려한 무대로 화제를 모았다.
● 가부키 공연을 촬영해 극장에서 상영
가부키 등 고전 작품을 감상한 관객은 2000∼2003년만 해도 연간 80만 명을 밑돌았으나 2004년과 2005년에는 90만 명을 넘었다.
여기에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공연기획사 쇼치쿠가 인터넷 예매시스템 도입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가부키 붐을 일으킨 것이 한몫했다. 쇼치쿠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가부키에서 벌어들이고 있으며 소속 가부키 배우만 300여 명에 이른다.
마케팅의 대표적인 사례가 ‘시네마 가부키’다. 시네마 가부키는 실제 무대에서 이뤄지는 가부키 공연을 고성능 카메라로 촬영해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으로, 영상에 익숙한 젊은 세대와 가부키의 거리를 좁혀 주었다.
첫 작품은 2005년 1월부터 2월 초순까지 도쿄 주오구 쓰키지의 한 극장에서 상영됐다. 흥행 수입은 약 2500만 엔(약 2억1250만 원)으로 이 극장의 평균 상영작보다 66% 많았다.
요금은 2000엔(약 1만7000원) 정도로 객석에서 직접 가부키를 보는 가격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층에게는 적지 않은 매력인 셈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가부키는?:
17세기 초반 일본에서 생긴 전통 예술로 처음에는 무용의 성격이 짙었으나 연극 형식으로 변했다. 초기에는 여성이나 미소년이 공연하는 가부키도 인기를 끌었으나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1629년과 1652년 각각 금지됐다. 최초로 가부키를 시작한 이는 여성이지만, 현대의 정통 가부키에서 여자 배역까지 남자가 맡고 있다.
가부키는 배우의 연기 분장 의상이 정교하고 화려해 일본의 문화 브랜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전통과 형식이다. 배우가 걷거나 앉는 법, 웃는 방법 등 동작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정해져 있고, 가부키 배우의 예명은 세습을 통해 대대로 전해진다.
일상에 뿌리를 내린 가부키 용어도 적지 않다. 숨겨진 내막을 뜻하는 ‘흑막(黑幕)’과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의미하는 ‘18번’이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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