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향기속으로 20선]<7>나는 걷는다

  • 입력 2006년 3월 27일 03시 05분


《내겐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동방법인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본문 중에서》

명상으로 유명한 틱구한 스님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밥을 씹을 때는 천천히 그것이 물이 될 때까지 씹어라, 그러면 그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비슷한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걸을 때는 천천히 발바닥을 전면에 닿게 하면서 느리게 걸어라, 당신의 발바닥과 땅이 하나라고 느껴질 때까지 천천히 걸어라.”

사람은 오감(五感)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문명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것을 한꺼번에 활용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지금 신문을 읽을 때 나를 주도하는 감각은 시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손에 잡고 있는 신문지의 촉감이나 의자와 접촉하는 엉덩이의 느낌,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들, 그리고 바람에 실려 오는 봄꽃의 향기를 모두 놓치게 한다.

우리는 대부분 길을 걸을 때 내가 지나온 길에서 어떤 풀꽃이 피어 있었는지, 자그마한 개미 가족이 저렇게 줄을 지어 어디로 떠나는지, 내 발길에 차인 저 작은 돌멩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는지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바빠서 목표를 향한 길을 뛰고 달릴 뿐이다.

여행을 떠나도 그렇다. 비행기를 타고 태백산맥을 넘어 강릉에 도착한 사람과 승용차로 도로 주변 푸른 수목과 바다를 스쳐서 지나간 사람,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대관령의 봄바람을 만끽한 사람, 그리고 풀벌레와 돌 틈으로 보이는 파란 새싹이 발에 눌릴세라 조심스럽게 길을 걸어 온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은 모두 다르다.

이 책을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여행이 그랬다. 그는 수십 년간 기자로서 전장으로 현장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본 것, 들은 것을 기록하는 것만 해 왔다. 그의 불꽃같은 저널리즘은 충분한 영예를 안겨 주었고 명예로운 은퇴를 보장해 주었지만,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은 63세의 나이에 자그마치 1099일 동안 무려 1만2000km를 걷는 도보여행이었다.

그가 이 도보여행을 결행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짓무른 발, 끊어질 듯 아픈 허리, 그리고 세균성 이질에 쓰러지면서까지 그가 알고자 한 것은 몸이었다. 그는 이 도보여행을 통해 그동안 잊고 살았던 몸의 살가움을 만끽하고, 자연과의 소통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여행기를 책으로 냈다.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나라들의 풍습과 종교,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그리고 가슴 졸이는 모험담은 정작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비행기나 자동차 대신 운동화를 선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되찾았던 것들에 대한 단서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대자연과 몸의 소통, 그리고 그것이 하나가 되는 눈물 나게 부러운 체험들을 곁눈질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생소하고 신기한 실크로드에 대한 여행기들은 즐거운 덤이다.

박경철 신세계병원장 ‘시골 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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