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天池사진 한장, 민족혼을 일깨웠다

  • 입력 2006년 3월 30일 03시 03분


동아일보 1921년 8월 29일자 3면에 크게 실린 백두산 천지 사진. 나라를 빼앗긴 지 꼭 11년 되는 경술국치일에 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부각시킨 이날 편집은 고개 숙인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 1921년 8월 29일자 3면에 크게 실린 백두산 천지 사진. 나라를 빼앗긴 지 꼭 11년 되는 경술국치일에 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부각시킨 이날 편집은 고개 숙인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강점기인 1921년 8월 29일.

동아일보 3면 상단에 큼지막한 백두산 천지(天池) 사진이 실렸다.

나라를 빼앗긴 지 꼭 11년 되는 경술국치일에 민족의 영산(靈山)을 부각시킨 편집 의도는 무엇일까. 독자들에게 일제의 문화적 침략에 맞설 민족정기를 배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잊어버릴 만하면 등장하는 무궁화 사진, 단군과 충무공을 상기시키는 기사와 사업, 일제 당국의 광화문 철거에 분노하는 사설 등도 모두 같은 의도를 담고 있었다.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동아일보의 이런 기사와 사진만 일제강점기 동안 500여 건에 달한다.

무장 항일 운동이 ‘피의 투쟁’이라면, 동아일보의 문화투쟁은 ‘혼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에는 지금 보면 뜬금없게 느껴지는 무궁화 사진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피고 지고 또 피는’ 무궁화는 불굴의 민족정신을 상징했다. 1931년 8월 26일자 2면에 실린 무궁화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 ‘뜬금없이’ 게재되는 무궁화 사진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자꾸 무성합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쿠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 얼마나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습니까.”

‘조선 국화(國花) 무궁화의 내력’이란 기사(1925년 10월 21일 2면) 중 일부다.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하면서 민족의식을 은근히 고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지면에는 뜬금없는 무궁화 사진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가는 비에 젖은 무궁화(1921년 7월 22일 3면) △비 갠 아침에 새로 단장한 무궁화(1923년 8월 18일 3면) △무궁화는 잘도 핀다!(1926년 8월 20일 2면) △날마다 새 꽃을 피우는 무궁화(1931년 8월 26일 2면) △초추(初秋)의 화단에 군림하는 무궁화(1933년 8월 26일 2면) △만발한 무궁화(1936년 8월 20일 4면) 등이 대표적 사례. 독자들이 그 무궁화에 담긴 ‘저의’를 모를 리 없다.

일제 당국의 언론 통제를 피하는 ‘이심전심 편집’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민족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했다. 일제가 경복궁 터에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과 해태상을 철거해 버리자 이를 통탄하는 기사와 사설을 잇달아 게재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의 광화문과 해태(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 “단군과 이순신을 잊지 말자”

단군은 한민족의 뿌리를, 충무공 이순신은 항일 구국을 상징한다. 동아일보는 이 두 인물을 민족의 가슴에 깊게 심어 놓았다.

동아일보의 최초 사업은 단군 영정 현상공모. 창간 열흘 만인 1920년 4월 11일 “단군은 우리 민족의 종조(宗祖)이다. 앙모(仰慕)와 존숭(尊崇)의 충심으로 단군 존상을 구한다”는 사고(社告)를 냈다.

1925년 11월 18일(음력 10월 3일) 사설 ‘개천절’을 읽어 보자.

“각인(各人)의 생명은 짧다. 그렇지만 각조선인(各朝鮮人)의 사명은 길다. 조선인 우리가 ‘동방의 빛’의 사도이기는 단군의 개천 기원 당시에서나, 을지문덕 때에나, 화랑 때에나, 동학 속에서나 똑같고 털끝만큼 다를 리 없는 것이다.”

단군은 곧 독립 의지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도 동아일보가 주도했다. 1931년 5월 기사와 사설로 ‘충무공 후손의 부채 때문에 그의 묘소가 경매로 넘어갈 처지인데, 이는 민족적 수치’라고 고발했다. 독자들이 성금으로 호응했고 같은 해 말 현충사가 준공될 수 있었다. ○ 광화문 해태와 함께 나눈 망국 설움

1923년 일제가 경복궁 터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대궐 앞의 해태상을 치워 버렸다. 이를 다룬 같은 해 10월 4일 3면 기사는 해태와 함께 울고 있다.

“임금이 있던 대궐에 총독부가 새로 들어서는데 너(해태)만이 편안히 살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500년 동안 섰던 그 자리를 떠날 때 네가 마음이 있다면 방울 같은 눈에도 응당 눈물이 흘렀으리라.”

그로부터 4년 뒤인 1927년. 같은 이유로 광화문이 완전 철거되자 동아일보는 4월 14일 1면 사설 ‘헐린 광화문’에서 “우리 전통이 뿌리째 뽑혀졌음을 본다”며 비통해했다.

○ 삼천리에 울려 퍼진 ‘조선의 노래’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

광복 이후에도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의 단골 반주곡으로 널리 불렸던 이 ‘조선의 노래(대한의 노래)’도 동아일보가 1931년 1월 일반 공모를 거쳐 만든 것이다. 민중이 다 함께 쉽게 부르며 광복의 희망을 키우는 ‘민족의 노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한글 보급운동 앞장

일제강점기 ‘국어’는 ‘국어’가 아니었다. 나라말은 일본 말이었다. 따라서 한글 보급 운동은 동아일보 문화투쟁의 시작이자 끝일 수밖에 없었다. 1928년 3월 16일 2면 사고(社告)는 “기막힌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인다”고 선포한다. 당시 문맹률은 약 90%.

동아일보가 ‘문맹퇴치가’까지 공모하며 본격적인 운동에 나서자 조선총독부는 같은 해 3월 29일 돌연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한글 보급 의지는 1931년 브나로드 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그로부터 4년간 계속된 이 운동은 △계몽대원 5751명 △한글 강습 수강생 9만7598명 △배부된 한글 교재 210만 부 등의 기록을 낳았다.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마춤법 통일안’이 완성되자 동아일보는 통일안을 20만 부 인쇄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보급했다. “(동아일보의) 인촌 김성수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서울로 올라오면 (조선어학회의) 이극로 박사가 마중을 나갈 정도로 두 분 사이는 가까웠다. 조선어학회 운영은 이극로 박사에 의한 것이고, 이 박사로 하여금 조선어학회를 운영하게 한 장본인이 김성수 선생임을 (일제) 경찰 당국이 모를 리 없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고초를 겪었던 고 이석린(李錫麟) 선생이 1993년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란 제목의 한글학회 문집에 남긴 회고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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