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시대의 통념을 깨뜨리는 진취적인 문화, 스포츠, 탐사 사업을 벌여왔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이벤트는 억눌린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신명 나는 문화 항거였고 광복 후에는 국민 문화 수준을 높이는 쾌거였다. ○ 여성 해방의 물꼬 튼 여자정구대회
1923년 6월 30일 서울의 경성제1여고(현 경기여고) 운동장에 2만여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관중석에는 모두 여자와 나이 든 남자뿐, 젊은 남성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젊은 남자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 담장 위로 젊은 남자들의 머리가 촘촘히 나와 있었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나무 위에도 청년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뭇가지가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면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비명과 폭소가 터져 나왔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국내 최초의 여성 스포츠 이벤트였던 제1회 전조선여자연식정구대회. 남녀가 유별하게 여겨지던 때라 다 큰 여학생들이 치마를 입은 채 코트를 누빈다는 것은 사회 통념상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회 불가(不可)’ 여론이 워낙 거세 동아일보는 ‘젊은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내걸고서야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6월 30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은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고 직업의 기회 균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이 대회의 취지를 밝혔다. 스포츠의 틀을 빌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한 것이었다. 올해 84회째를 맞는 전국여자정구대회는 단일 종목으로는 국내 최장수 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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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동아일보는 1922년 12월 21세의 재일 한인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추진했다. 안창남은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1등 비행사 면허를 따낸 천재적 비행사. 동아일보는 저명인사 47명으로 ‘안창남 후원회’를 조직해 안창남에게 새 비행기를 사주기 위한 성금을 모았다. 12월 5일 환영 인파에 묻혀 서울에 도착한 안창남은 여기저기서 부속품을 모아 맞춘 기체에 한반도 그림을 새긴 ‘금강호’를 조립했다. 마침내 10일 한국인 비행사가 조국의 하늘을 처음 날아오르는 역사적인 비행을 보기 위해 여의도에는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모처럼 하늘의 자유를 만끽했고, 안창남은 한강을 넘어 동대문을 돌아 순종이 거처하는 창덕궁 상공에서 날개를 흔들며 경의를 표했다.
○ 한국인 불굴의 의지 파랑새호-사하라 탐험
1980년 5월 23일 자그마한 배 한 척이 울산 현대조선소 제3독을 떠났다. 뱃머리에는 ‘파랑새’라는 이름이 선명했고 후미에는 태극기와 동아일보 사기(社旗)가 나란히 나부끼고 있었다.
항해 75일째인 8월 5일 오후 멀리 수평선 너머로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로스앤젤레스 남쪽 샌타모니카의 마리나 델레이 요트항.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일엽편주’ 요트에 의지한 채 태평양을 건넌 두 젊은이 이재웅, 노영문 씨의 도전정신은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는 사하라 대탐사가 국민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1995년 11월 7일 6명의 탐사대원이 대서양 연안 모리타니의 누악쇼트를 출발해 6개월 25일을 꼬박 걸어서 홍해에 면한 수단의 수아킨에 도착한 것이 이듬해 6월 6일. 이들이 주파한 거리는 7403km였다. 목표점에 도착한 최종렬 대장은 감격에 겨워 태극기와 동아일보 사기를 들고 홍해로 뛰어들었다.
○ 이념의 장벽 넘어 문화 올림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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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냉전의 장벽이 허물어진 세계사적 이벤트로 꼽히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기간에는 구소련의 예술단체인 볼쇼이 발레단과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초청했다. 볼쇼이 발레단은 ‘세계 발레계의 신화’로 불리는 단체. 당시 한국과 소련은 국교를 맺기 전이어서 발레단 초청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동아일보가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성사시키자 한국 공연예술계는 “광복 후 최대의 문화적 사건”이라며 흥분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문화 인재 배출 산실
1964년 동아일보사는 한국 최초의 연극상인 제1회 동아연극상 참가작을 공모했다. 원로 극작가 박조열 씨는 “당시 쌀 한 가마 3000원, 4급 공무원 월급이 3000원이었다”며 “연극인들은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 극단에 수여되는 상금 ‘30만 원’에 놀라고 감격했다”고 회고했다.
1961년 탄생한 동아음악콩쿠르, 1964년 시작된 동아연극상과 동아무용콩쿠르, 1984년 출범한 동아국악콩쿠르는 각 분야의 스타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다. 피아니스트 신수정 이대욱 김대진 강충모 씨,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김남윤 김민 씨, 첼리스트 이종영 씨, 성악가 신영옥 연광철 씨, 부천필 음악감독인 지휘자 임헌정 씨 등이 동아음악콩쿠르 수상자들이며 대금 안성우, 판소리 오정해(영화배우) 씨 등은 동아국악콩쿠르가 발굴한 스타들이다.
무용콩쿠르의 경우 김혜식 한국예술종합학교 전 무용원장이 제1회 대회 금상을 받았으며 숙명여대 박인자(국립발레단장), 성균관대 김경희, 한양대 문영철 교수 등도 수상했다. 국내 양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주역 무용수 이원국 김주원 이원철 임혜경 엄재용 씨 등도 이 콩쿠르 출신. 무용평론가 문애령(1983년 동아무용콩쿠르 발레부문 동상 수상) 씨는 “‘우리 동아콩쿠르에서 만났지요?’라는 대화는 무용가들 사이에서 특별한 연대감을 나타내는 증표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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