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해서 연애 한번 못해 본 대학 영문학 강사 대우(박용우). 그는 아랫집에 이사 온 독특한 분위기의 여자 미나(최강희)에게 얼떨결에 데이트를 신청한다. 취미는 독서에 미술전공을 하고 있다던 그녀. 하지만 ‘죄와 벌’도 모르고 몬드리안의 그림도 모른다. 커다란 가방 가득 뭔가를 실어나간 미나는 온몸에 흙을 묻히고 들어오고…. 대우는 미나의 무시무시한 정체를 알게 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온탕’과 연쇄살인극이라는 ‘냉탕’이 몸을 섞은 이 영화는 웃음을 유발하는 데 있어 독특한 코드를 갖고 있다. 심각하고 진지한(혹은 약간 끔찍한) 대사나 장면을 우스꽝스러운 상황 한복판에 던져 넣고 의도된 불협화음을 만듦으로써 감각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소심증의 발로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디테일이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대사는 음절 단위까지 조곤조곤 빛의 속도로 뱉어 내는 박용우의 믿기 힘든 입놀림을 통해 살아 움직인다. 대우와 미나의 첫 섹스 장면에서 “아, 땀 때문에 씻어야 되는데…”(미나) “저는 저혈압이라서 짜게 먹어도 돼요”(대우) “거봐, 짜잖아”(미나) “아뇨. 바로 이 맛이야”(대우) 하고 주고받는 탄력 만점의 대화가 그러하듯이.
영화는 살인을 웃음 유발의 장치로 사용한 ‘원죄’ 탓에 도덕성의 잣대와는 타협도 배신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선에서 결말을 맺는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어차피 ‘18세 이상’ 등급을 받을 바엔 아예 ‘세게’ 나갔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실도 꼭 죄만큼 벌을 받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감독은 ‘재밌는 영화’의 각본을 맡았던 손재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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