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암을 읽는다/박희병 지음/463쪽·1만5000원·돌베개
여기 20편의 글이 있다. 연암의 한문 소품들이다. 편지 글도 있고, 일기 형태의 글도 있고, 죽은 이를 추모하는 글도 있다. 한글로 번역해봤자 모두 합쳐 50여 쪽 분량이다. 그러나 연암 전문가인 박 교수는 이 짧은 글들에 담긴 깊이와 미학을 펼쳐보임으로써 연암의 글들을 고전의 반열로 올려놓는다.
먼저 원문을 한글로 번역한 글맛을 보자. 마흔셋의 나이에 숨을 거둔 큰누이의 관을 실은 배가 강을 건너는 것을 바라보며 연암이 지은 구절이다.
![]() |
월명사의 ‘제망매가’에서부터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로 면면히 이어지는 누이에 대한 애틋함이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가.
연암이 김포에서 강화해협 사이에 무지개가 걸린 풍경을 묘사한 글을 보자. “멀리 바라보니 연안과 배천 사이에 빗발이 흰 비단처럼 드리워 있다.”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절묘한 표현이다. 단 한 문장으로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내고 있지 않은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의 마음을 표현한 편지 구절을 보자.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는 광경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사외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Y’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사방을 돌아봐도 아무도 없자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기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실로 독창적인 역사평론이 아닐 수 없다.
![]() |
박 교수는 또한 연암의 글들이 한문학의 전통적 작법에 얼마나 파격적 변화를 줬는지를 안내함으로써 대문장가로서 연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죽오(竹塢)라는 당호가 적힌 집의 사연을 적은 글을 보자. 연암은 대나무가 절개의 상징으로 지나치게 상투화된 것을 지적하며 “대나무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되뇌다가 돌연 그 집주인의 외곬의 표정에서 대나무의 심상을 발견하고 붓을 들었다. 대나무에 사람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나무에 비유하는 역발상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고전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 원문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원문을 새롭게 해석하는 수많은 주해가 쌓일 때 비로소 고전이 된다. 연암의 글은 분명 그만한 아취와 기세를 갖추고 있다. 지금 우리는 200여 년 전의 그 글을 당당히 호명할 자세를 갖췄는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