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제(35·사진) 씨는 최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한글 디자이너다.
그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영문에 비해 조형성과 미감이 떨어진다며 한글을 구박했을 때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도’ 닦는 심정으로 한글에만 매달린 것이 10년째다.
그동안 인터넷용 한글 폰트, 위성방송 ‘스카이 라이프’의 디지털 방송 자막용 폰트, ‘CJ 홈쇼핑’ 데이터 방송용 폰트를 개발했다. 헷갈리기 쉬운 친인척의 촌수와 호칭을 남녀로 나눠 보여주는 ‘가계도’라는 실용적이고 재미있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책의 앞면을 펼치면 남자를 중심으로 가계도를 그린 큰 그림이 접혀 있는데 책을 뒤로 한 바퀴 돌리면 여자 중심의 가계도가 나타난다. 납작한 책 속에 담겨진 것은 2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3차원 입체다.
0.01mm의 차이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이 글자 디자인이다. 이렇게 바늘 같이 예민한 작업을 하다 보니 성격도 변해 평소에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대충대충 넘긴다고 한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출신인 그는 대학 시절 오로지 자신의 창작물로만 디자인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한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한글 디자인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꼼꼼하고 진지한 성격과 잘 맞았지만, 일종의 소명 의식을 느낀 것이다. 한글 디자인은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공 디자인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글자를 디자인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폰트를 가진 디자이너가 많다. 하지만 한글은 이 대목이 좀 어렵다.
영어는 대소문자만 고려했을 때 52자만 디자인하면 해결되지만, 한글은 최소 2350자에 이른다. 또 현대 국어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1만1172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지간한 끈기와 인내심이 없으면 버텨내기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글자 한 벌을 디자인하다 보면 6개월에서 2년이 후딱 지나가 버린다.
그는 2004년 ‘방일영 문화재단’이 제정한 한글 글꼴 창작지원금의 첫 수상자가 됐다. 당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여겼다. 그만큼 그가 한글에 쏟은 애정과 시간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가 제안한 것은 세로쓰기용 폰트였다. 가로쓰기가 일반화된 요즘 웬 세로쓰기인가 싶지만 아직도 책이나 간판에는 세로쓰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세로쓰기에 적합한 폰트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세로쓰기 문화도 지속되기 바란다. 그가 개발한 세로쓰기 전용 폰트는 이달 말 완성될 예정이다.
전은경 월간 ‘디자인’ 기자 lilith@desi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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