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저녁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10년 넘게 기다려 온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35)의 첫 내한공연에서 감동을 받은 팬들은 마치 다시 못 볼 연인처럼 밤늦도록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풍성한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키신은 객석의 환호와 비명,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1시간 반 동안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쇼팽의 ‘마주르카’ 등 무려 10차례나 앙코르 곡을 선사했다. 밤 11시 반에 모든 앙코르곡이 끝났고, 이어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려 준 1000여 명의 관객을 위해 자정을 넘겨 12시 반까지 팬 사인회를 했다.
20, 30대 젊은 관객들이 이처럼 밤늦도록 열광하는 것은 국내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의 첫 내한공연에 총 2500장의 티켓은 별다른 홍보 없이도 2월 중순 일찌감치 매진됐고, 표를 구하지 못해 로비에서 모니터로 관람하는 관객도 200명이 넘었다. 서울 예술의 전당 안호상 국장은 “예술의 전당에 이렇게 늦게까지 많은 사람이 남은 것도 처음이고, 커튼콜과 앙코르곡도 최다 기록 같다”고 말했다.
키신은 생후 11개월 때 누나가 피아노로 치는 바흐의 ‘푸가’ 선율을 기억해 두었다가 흥얼거렸다는 ‘신동’ 피아니스트. 30대 중반의 더벅머리 총각으로 성숙한 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곡(3번, 26번)과 쇼팽 스케르초 전곡을 한음 한음이 살아 있는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연주해 청중을 압도했다.
보통 해외 공연에선 4번 정도의 앙코르 요청을 받아들이는 키신은 이번 공연에서 30여 차례의 커튼콜과 10곡의 앙코르를 힘든 기색 없이 미소 띤 얼굴로 해냈다. 사인회를 하는 도중 그는 기획사 측에 “이탈리아 관객이 세계에서 가장 뜨겁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 보니 한국 관객이 가장 열정적이다”라며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고 말했다.
음악칼럼니스트 장일범 씨는 “1990년대 후반 러시아에서 키신의 10년 만의 귀국공연을 지켜봤는데 그때도 환호 속에 10번의 앙코르 곡을 들려주었다”며 “키신은 개런티가 가장 비싼 피아니스트이지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청중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풀 서비스를 하는 연주자로 오늘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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