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귀로 보는 인생 2막

  • 입력 2006년 4월 12일 03시 02분


연습실의 분주한 풍경을 배우 홍성민(66) 씨는 이제 귀로 ‘본다’. 소품을 옮기는 소음, 한쪽 구석에서 웅얼웅얼 대사를 외는 소리, “2시 반부터 가요(시작해요), 준비하세요”라는 진행자의 들뜬 목소리…. 연습실에 들어서던 탤런트 윤유선 씨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선생님, 저 유선이에요.” 아역 탤런트 시절부터 그를 보아 온 윤 씨다. 예전 같았다면 인사말은 “안녕하세요”였을 테지만 이제는 손을 잡고 이름을 말한다. 윤 씨처럼 동료 연기자들은 홍 씨의 ‘달라진’ 처지에 맞춘 대화법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연습실. 홍 씨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18∼2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내 극장 ‘용’에서 공연되는 연극 ‘헬렌 켈러’를 연습 중이었다. 그가 맡은 역은 헬렌 켈러의 스승인 애니 설리번이 다닌 퍼킨스 맹학교의 맹인 교장선생님.

홍 씨는 올해로 데뷔 45년째다. 그중 38년간 그는 앞을 보는 배우였다. 하룻밤에 대사 200∼300마디쯤은 거뜬히 외우는 실력파로서 TV 드라마 ‘제1공화국’의 박헌영 같은 강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 2004년.

“배우로서 제가 참 행운아죠. 연기자는 누구나 체험을 통해 자기 역할에 실감을 더하고 싶어 하는데 앞을 못 보면서 맹인 연기를 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끝났다”고 자포자기했다. 몇 달을 폭음으로 보내다가 이러다가는 1년도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앞을 못 보는 내가 눈 뜬 사람들을 이해하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을 뒤집으니 세상일이 다르게 이해됐다. 왜 장애인들이 ‘정상인’이라는 말 대신 ‘예비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공감하게 됐다. 그 자신이 환갑 넘어 신체 기능 일부를 잃은 중도 장애인이었다. 없으면 좋을 일이지만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게 인생이었다.

장애를 삶의 ‘다른 상태’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우로서 다시 세상에 나섰다. 지난해부터 TV 출연도 하고 연극 무대에도 서는 그는 다른 이의 도움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마워한다.

“눈 대신 손 발 귀 다 움직여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요. 그래도 안 될 땐,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눈이 다 내 눈이라고 생각하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선행할 기회도 생기는 거지 하고 마음 편히 여깁니다.”

앞을 못 본다고 배우로서 살아온 세월마저 헛것이 되지는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보는데, 나는 남을 보지 못하는 두려움. 그것은 일찍이 신출내기 연극배우 시절 조명이 환한 무대에 서서 컴컴한 객석을 바라보며 느꼈던 것이다. ‘그게 무서웠다면 나는 결코 연기자가 될 수 없었다’는 자신감이 앞 못 보는 그를 당당하게 만든다.

‘헬렌 켈러’에서 그의 출연 시간은 도입부 5분여. 그가 연기하는 맹인 교장선생님은 헬렌 켈러를 가르치러 떠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가 귀머거리에 장님에 벙어리라는구나. 하지만 누가 알겠니? 마치 잠겨 있는 금고 같아서 일단 열어 보면 그 속에 보석이 담겨 있을지….”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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