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794년 금강산 유점사 중건

  • 입력 2006년 4월 19일 03시 01분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벌떡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으면서) 이렇게 왔습니다.”

고승 효봉(1888∼1966) 스님이 37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해 수년간 만행 끝에 석두(石頭)화상을 찾아간 곳은 금강산이었다. 스승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와 제자를 기다리던 스승은 이렇듯 몇 마디 말로 이심전심을 이뤘다.

금강산에는 예로부터 명승고덕이 배출된 사찰이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유점사는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 등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대찰이었다. 신라 남해왕 원년(4년)에 건립된 유점사는 1794년(조선 정조 18년) 에 중건됐다.

간첩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는 ‘문명교류사의 연구’란 책에서 유점사의 창건 설화는 한국 불교의 ‘남래설(南來說)’을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인도의 문수보살이 53불상을 쇠종 속에 넣고 배에 띄워 보냈는데, 그것이 월지국을 거쳐 900여 년 만인 남해왕 원년에야 금강산 동쪽 안창현 포구(현 강원 고성군 간성)에 표착했다. 53불이 금강산에 터를 잡고 절을 지으려 하자 아홉 마리의 용이 방해했다. 용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큰 비를 내리게 했고, 53불은 느릅나무에 올라가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 용을 내쫓았다. 결국 용들이 거처를 옮긴 곳은 구룡연(九龍淵)이 되었고, 느릅나무(楡)가 있던 터에 세워진 절은 유점사(楡岾寺)가 되었다.’(고려시대 민지가 쓴 ‘금강산유점사사적기’)

유점사의 창건 설화는 한국 불교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384년 백제 침류왕, 6세기 신라 법흥왕 때 북방의 육로를 통해 받아들여진 시기보다 훨씬 먼저 남방의 바닷길을 통해 전해졌음을 말해 준다. 또한 아홉 마리 용과 싸웠다는 것은 초기 불교의 유입 과정에서 토착 신앙과의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태고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던 금강산 유점사는 1951년 6·25전쟁 도중 불에 타 사라졌다. 특히 국보급 문화재였던 53불상과 능인전이 모두 소실된 것은 안타까운 일. 현재는 동종과 화강석 9층탑만 남아 있다. 유점사에 모셔졌던 53불이 복원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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